부천 FC 1995의 법무팀장으로 계신
부천 서포터 김형찬님의 글입니다.
0. 내가 처음 축구경기장을 간 것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제주제일고와 오현고 간의 경기가 펼쳐졌던 제주 공설운동장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던 터라 저로서는 경기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경기가 보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 날의 기억에 대해서는 저는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뛰어다니는 선수들이 점처럼 보였던 인상만이 남았습니다. 어쨌든 그 날은 제가 처음으로 경기장을 찾은 날이었고, 나는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축구를 배웠습니다.
1. 보통의 가정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저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다지 많지는 못합니다. 늘 그렇듯 학창시절은 집에 다녀온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하루의 3분의2를 학교에서 보냈고, 친구를 좋아하던 성격 탓에 휴일에는 밖으로 돌아다니느라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아버지께서 처음 장만하신 중고차로 서울랜드에 잠시 갔다온 것이 거의 유일한 기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나와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는 데에는 애초에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후에는 바로 연수원에 입소하여야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과, 아버지와 함께 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2. 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동생의 부탁을 받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아보기를 원하였고, 그 말대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오던 중 간만에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대접한 설렁탕을 두어술 뜨시더니 이내 숟가락을 놓아버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처음 아버지의 건강이 대단히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나 하나만 생각하느라, 저는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단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가 참 한심했습니다.
3. 마음같아서는 매일 아버지를 찾아뵙고 싶었지만, 당시는 부산에서 근무할 때라 주말 밖에 아버지를 뵐 시간이 없었습니다. 평생 효도따위를 해본 적이 없었던 탓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드려야 할 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홈경기 때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일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10월 2일 전북 홈경기부터 아버지와 함께 다니기 시작하였 듯 합니다. 서포터들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김밥과 순대를 펴 놓고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주 한 잔 마시며 경기를 보는 재미는 이전에 느껴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4. 아버지께서는 소주를 잔에 가득 따르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적게 따르는 건 정떨어지는 것이라며 종이컵에도 가득가득 부어주시곤 하였습니다. 늘 어느 정도 술에 취해 경기를 관전하였으니 경기가 제대로 기억이 날 리는 만무합니다. 하지만, 갈 때마다 늘 이겼으니 아버지도 술김에 참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서울 전에서는 휴지폭탄을 대신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고, 어느 경기인가 정해성 감독님이 서포터 쪽으로 다가와 이겨보자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는 "참 훌륭한 감독 같다"며 칭찬을 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는 데까지는 실패했지만, 아버지는 분명 그 시간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005년이 지나갔습니다.
5. 부산에서 일이나 인간관계나 적응이 잘 되었던 탓에 한 해 더 일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만, 결국 서울 쪽으로 올라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함께 또 축구를 보겠다는 생각이 가장 큰 이유였지요. 그리고 서울 쪽으로 올라올 날을 기다리던 중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SK 제주로 연고이전...
6.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그 많은 곳 중에 SK가 연고이전을 한 곳은 다름아닌 아버지께서 태어나 40년을 사셨고, 제가 태어나 10년을 살았던 제주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주도에 팀이 있었으면 좋다는 생각을 수차례 했던 터였습니다. 그 곳 고등학교의 경기가 얼마나 열정적인지 잘 알고 있던 터였고, 제주 사람들이 그 곳 출신 선수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언젠가 제주도가 빌바오와 같은 그 곳 사람들로 이루어진 팀을 가지기를 고향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라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터졌습니다.
7. 제가 SK를 '제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연고이전을 인정하기 싫었기도 하였지만, 제 고향을 그렇게 더럽히기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연고이전한 그들을 욕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제주도에 생긴 팀을 분명히 좋아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획했던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고, 아버지께서는 제가 서울로 올라온 후 부산으로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계속 인천에 계셨더라면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의 경기를 보러가야 했을지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던 부천 경기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제주를 외치셨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8.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건 그로부터 1년 후의 일입니다. 여름에 제주로 내려가 아버지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던 자리회와 함께 한라산 소주를 마시자고 약속을 드렸건만, 두 달을 못 참으시고 먼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불의의 사고라 당신께서도 예상치 못하셨겠지만, 아들을 불효자로 만드시고 가신 게 너무나 원망스럽더군요.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죄스러운게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저와 제주의 사이는 더 깊이 골이 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곳은 제 고향이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 과연 그 곳이 나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9. 그리고,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스폰서는 SK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제주에 대해서 비난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내 고향을 화해시켜 주려고 그런 건 아니었을까?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난 내 마음 속에서 제주와 화해를 했습니다.
10. 첫 경기가 벌어진 다음날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팀도 햇수로 3년 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 경기를 펼쳤습니다. 경기가 펼쳐지던 날, 헤르메스가 자리잡았던 곳은 3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나에게 추억과 회한의 장소였던 그 곳은 이제 또 누군가에게 의미를 지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많은 분들이 그 곳을 오가며 그 곳에서 있었던 추억과 기대를 이야기하겠지요.
11. 다시 부천에 축구가 돌아올 수 있도록 고생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리고, 지난 2년 간 잊지않고 우리팀을 기다려준 모든 분들께 또한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경기에서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에게 또한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내게 축구를 알려주고 가르쳐주고 함께 해 준 아버지는 더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저는 여전히 저의 축구에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곳으로 갈 때마다... 아버지는 늘 제 마음에 다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축구는 부천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잡설로 이번 경기의 후기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함께 하신 여러분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ireds2002 소모임 아이레즈 사이트입니다.
부천 서포터 김형찬님의 글입니다.
0. 내가 처음 축구경기장을 간 것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제주제일고와 오현고 간의 경기가 펼쳐졌던 제주 공설운동장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던 터라 저로서는 경기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경기가 보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 날의 기억에 대해서는 저는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뛰어다니는 선수들이 점처럼 보였던 인상만이 남았습니다. 어쨌든 그 날은 제가 처음으로 경기장을 찾은 날이었고, 나는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축구를 배웠습니다.
1. 보통의 가정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저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다지 많지는 못합니다. 늘 그렇듯 학창시절은 집에 다녀온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하루의 3분의2를 학교에서 보냈고, 친구를 좋아하던 성격 탓에 휴일에는 밖으로 돌아다니느라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아버지께서 처음 장만하신 중고차로 서울랜드에 잠시 갔다온 것이 거의 유일한 기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나와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는 데에는 애초에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후에는 바로 연수원에 입소하여야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과, 아버지와 함께 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2. 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동생의 부탁을 받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아보기를 원하였고, 그 말대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오던 중 간만에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대접한 설렁탕을 두어술 뜨시더니 이내 숟가락을 놓아버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처음 아버지의 건강이 대단히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나 하나만 생각하느라, 저는 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단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가 참 한심했습니다.
3. 마음같아서는 매일 아버지를 찾아뵙고 싶었지만, 당시는 부산에서 근무할 때라 주말 밖에 아버지를 뵐 시간이 없었습니다. 평생 효도따위를 해본 적이 없었던 탓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드려야 할 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홈경기 때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일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10월 2일 전북 홈경기부터 아버지와 함께 다니기 시작하였 듯 합니다. 서포터들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김밥과 순대를 펴 놓고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주 한 잔 마시며 경기를 보는 재미는 이전에 느껴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4. 아버지께서는 소주를 잔에 가득 따르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적게 따르는 건 정떨어지는 것이라며 종이컵에도 가득가득 부어주시곤 하였습니다. 늘 어느 정도 술에 취해 경기를 관전하였으니 경기가 제대로 기억이 날 리는 만무합니다. 하지만, 갈 때마다 늘 이겼으니 아버지도 술김에 참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서울 전에서는 휴지폭탄을 대신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고, 어느 경기인가 정해성 감독님이 서포터 쪽으로 다가와 이겨보자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는 "참 훌륭한 감독 같다"며 칭찬을 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는 데까지는 실패했지만, 아버지는 분명 그 시간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005년이 지나갔습니다.
5. 부산에서 일이나 인간관계나 적응이 잘 되었던 탓에 한 해 더 일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만, 결국 서울 쪽으로 올라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함께 또 축구를 보겠다는 생각이 가장 큰 이유였지요. 그리고 서울 쪽으로 올라올 날을 기다리던 중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SK 제주로 연고이전...
6.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그 많은 곳 중에 SK가 연고이전을 한 곳은 다름아닌 아버지께서 태어나 40년을 사셨고, 제가 태어나 10년을 살았던 제주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주도에 팀이 있었으면 좋다는 생각을 수차례 했던 터였습니다. 그 곳 고등학교의 경기가 얼마나 열정적인지 잘 알고 있던 터였고, 제주 사람들이 그 곳 출신 선수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언젠가 제주도가 빌바오와 같은 그 곳 사람들로 이루어진 팀을 가지기를 고향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라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터졌습니다.
7. 제가 SK를 '제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연고이전을 인정하기 싫었기도 하였지만, 제 고향을 그렇게 더럽히기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연고이전한 그들을 욕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제주도에 생긴 팀을 분명히 좋아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획했던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고, 아버지께서는 제가 서울로 올라온 후 부산으로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계속 인천에 계셨더라면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의 경기를 보러가야 했을지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던 부천 경기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제주를 외치셨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8.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건 그로부터 1년 후의 일입니다. 여름에 제주로 내려가 아버지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던 자리회와 함께 한라산 소주를 마시자고 약속을 드렸건만, 두 달을 못 참으시고 먼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불의의 사고라 당신께서도 예상치 못하셨겠지만, 아들을 불효자로 만드시고 가신 게 너무나 원망스럽더군요.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죄스러운게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저와 제주의 사이는 더 깊이 골이 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곳은 제 고향이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 과연 그 곳이 나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9. 그리고,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스폰서는 SK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제주에 대해서 비난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내 고향을 화해시켜 주려고 그런 건 아니었을까?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난 내 마음 속에서 제주와 화해를 했습니다.
10. 첫 경기가 벌어진 다음날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팀도 햇수로 3년 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 경기를 펼쳤습니다. 경기가 펼쳐지던 날, 헤르메스가 자리잡았던 곳은 3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나에게 추억과 회한의 장소였던 그 곳은 이제 또 누군가에게 의미를 지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많은 분들이 그 곳을 오가며 그 곳에서 있었던 추억과 기대를 이야기하겠지요.
11. 다시 부천에 축구가 돌아올 수 있도록 고생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리고, 지난 2년 간 잊지않고 우리팀을 기다려준 모든 분들께 또한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경기에서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에게 또한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내게 축구를 알려주고 가르쳐주고 함께 해 준 아버지는 더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저는 여전히 저의 축구에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곳으로 갈 때마다... 아버지는 늘 제 마음에 다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축구는 부천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잡설로 이번 경기의 후기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함께 하신 여러분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ireds2002 소모임 아이레즈 사이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