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를 보면서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승점 3점을 따지 못하면 플옵 어려워 진다", "상대는 리그 약체" 등 어제 경기의 기본 전제 조건을 봤을 때, 선수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몸은 무거웠고, 절실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 났을까.
우리가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이 한 두 번은 아닙니다. 부천 축구를 벌써 30년 가까이 보면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당할 때마다 "좋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며 스스로 위안을 했는데, "그럼 좋은 일은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냐"고 울컥할 정도로 여러번 당하고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제 경기 10분 정도 남았을 때부터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했습니다. 경기 후에는 한참 앉아 있다가 막판에 나왔고, 나와서도 경기장을 떠날 수 없어서 아쉬움에 스타디움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돌면서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집에 오면서는 몇 명과 전화를 하면서 내가 본 게 맞는 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들었습니다. 뭐 어쩌면 다 소용없는 짓이지만 나도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같이 화를 내야 좀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부질없는 짓이지만, 몇 가지 주제별(?)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정리 했습니다.
1. 선수들은 태업을 하였나?
믿을 수 없는 경기력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잔뜩 움추려 들었고, 공을 빼앗기고 그걸 그냥 지켜보다가 크로스바를 맞는 등 무언가에 홀린 듯한 이상한 플레이가 이어졌습니다. 정말 잘 하던 우리 팀 맞나? 1분 1초가 아까운데 공을 돌리고 있고, 어렵게 올린 크로스는 나가거나 골키퍼에게 안겼습니다. 어쩌면 단체로 이렇게 못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경기 끝나고 "선수들이 플옵 가기 싫어서 태업했다", "이미 시즌 막판이니까 다른 구단과 링크된 선수들이 부상을 우려해 무리하지 않는다", "승격을 싫어하는 선수들도 있다" 등 악에 받친 소수의 음모론적인 목소리마저 터져나왔습니다.
들을 때는 나도 솔깃했지만 제가 볼 때는 이런 울분에 찬 분석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선 선수 중에 몇 명은 내년에 팀의 승격과 상관없이 1부리그에 자력 진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이런 저런 연락도 올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런 선수들은 소수이고 그런 접촉이 있더라도 남은 시즌이 가치를 보여야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할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 상당수가 계약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1부리그에 만약 올라가더라도, 같이 올라가는 상황입니다. 태업할 이유가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컨디션이 나빴다" 그리고 "몇몇 선수들은 이상하게 기량이 떨어졌다"입니다.
2. 그렇다면 선수들은 왜 그렇게 발이 무거웠을까?
내 생각에는 선수들이 지나치게 낙관하고 경기에 임한 것 같습니다. 경험적으로 심리적 낙관은 답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멘탈은 감독 코치가 잡아야 하는데, 어제 전남이 천안에게 0-2로 패한 것 보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남 감독도 대학을 수년간 주름잡아서 프로 감독 선임 때 단골 후보였는데, 전남이 품어서 많은 구단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런 감독도 천안전에 나사 풀고 등장한 선수들을 다잡지 못했습니다. 물론 '나사 풀린' 이 가정은 추정입니다.
어제 경기 앞두고 만약 선수들이 멘탈이 풀러진 상태, 특히 수원 전에 육수 다 뿜어낸 다음이라 체력을 회복이 되었어도 멘탈은 채워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데,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감독, 코치의 역할이지만 참 어렵습니다. 이걸두고 감독이 못했다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경기장 문제도 있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 국대 선수들도 홈에서 팔레스타인에게 이기지 못할 때 있습니다.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고 나사 다 풀고 경기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3. 최근 예산 삭감 논의가 영향을 주었나?
최근 우리 구단의 최대 이슈는 플옵 진출과 함께 예산 문제입니다. 부천시 예산이 내년에 1000억원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구단에 대한 예산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처음에 10억 삭감 이야기 나왔다가 점점 삭감 폭을 줄이고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물가 상승률이나 임근 상승 등 여러가지 측면을 고려하면 현행 유지도 삭감인데, 줄인다니 힘이 빠질 일입니다. 소문에 따르면 K1, 2 통틀어서 예산이 줄어드는 팀은 성남과 부천 뿐이라고 합니다. 성남은 이미 100억 대 팀 아닙니까? 부천은 그냥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조건입니다. 하필 부천이 왜 그런 곳인지... 참... 수원전때 와서 고위직들 사진 찍고, 선수단 앞에서 이야기하고 폼은 다 잡고 주는 건 리그 최저 수준이니, 이러고도 황희찬 골 넣으면 부천의 아들이라는 등 이상한 소리가 날라다니고.. 축구에 숟가락은 올리지만 주는 건 적고 뭐 그런 도시가 왜 하필 우리 부천인지..
이러니 구단 전체적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를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이런 분위기가 그런 영향을 미쳤다면 대표님과 단장님이 선제적으로 다독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만약에 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예산은 줄어들 수 있지만, 예산이 줄어든다고 선수 연봉이 일률 삭감되는 것도 아니다", "예산 삭감 폭이 후원사 섭외 등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최근 관중 증가 추이로 볼 때 내년에는 관중 수익이 오를 것이다" 등 조직의 수장으로서의 든든함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 항목은 개인적인 추정입니다. 이것이 팀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4. 어제 경기 준비는 적절했나?
경기 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휴식기 전지 훈련 후 경남에게 대승한 후 상승세를 이어가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지훈련 때 준비한 거 몇 경기 써먹고, 그 전술이 분석 당하자 대책이 없다" 잘 모르겠지만 결과만 두고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 청주 전 때 경기전 인터뷰에서 우리 선수는 "청주에 대한 분석을 많이 했다. 승리할 것이다"는 내용으로 발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 끝에 비겼습니다. 비전문가적 분석이지만 "최윤겸의 청주를 대비했는데, 권오규의 청주가 나오자 대응이 안 됐다". 실제로 청주는 그날 다 뜯어고치고 나왔고, 부천은 허둥댔습니다.
우리 팀은 적어도 겉으로 본 모습으로는 "준비된 것이 막히면 대책이 없는 팀"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경기 후 또 다른 친구는 "이영민 감독은 플랜B가 없는 감독이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 있습니다. 어제도 두 줄 견고한 안산 수비를 뚫지 못했습니다. 이전 시즌 안산만 만나면 그랬죠. 만약 감독님이 이 글을 본다면 "좀 더 종합적으로 준비를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플랜A를 잘 하는 감독이니, 시야를 넓히면 더 나은 준비도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이미 그렇게 했는데 안 먹히는 것이라면 할 수 없고요.
추가하면 어제 루페타, 박창준 조합은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는 이 경우 빠르게 교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정빈, 한지호 들어오고 숨통 터진 걸 보면 부족했던 시간이 아쉽습니다. 상대의 수비를 뜷지 못할 때는 멀리서라도 좀 때리면 어땠을까. 슛을 너무 아꼈고, 안 되는 조합으로 나무 시간을 보낸 것 아닌가..
5. 잡설
어쩌면 지금 부천의 순위는 예산이나 라인업 등을 볼 때 대단히 합리적인 입니다. 우리 선수들은 지금 다 사랑스러운 우리 선수들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지금 이 선수들을 시장에 풀었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팀에서 넙죽 모시고갈 선수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팀에서 나간 선수들을 받아가던(?) 아산같은 팀이 지금 승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산도 어제 뛰는 거 보니까 우리 선수들이 자리 잡을 팀이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천안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힘을 내줬으면 합니다. 이영민 감독 취임 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감독도 기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산이 적은 팀인데 시간을 갖고 빌드업 해서 승격과 같은 성과를 내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기억합니다. 그 당시 각오를 다시 새기고 남은 시즌을 진행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감독 이야기를 위에 좀 했는데, 안재준, 서명관 길러내서 적지 않은 이적료 수입을 구단에 안기고(물론 스카우터도 잘 한 것이지만), 특히 서명관은 추정컨데 그의 이적료 만으로 내년 예산 삭감분을 메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걸 보면 이영민 감독은 적어도 선수 트레이드 부분에서는 연봉 값을 한 것이라 보이고요, 단장 등 수뇌부는 요즘 열심히 한다는 평이 많은 듯 하지만, 좀 더 뛰어서 구단에 수익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안양은 지역도 가깝고, K1 때부터 악연도 많고 해서 지금 상황이 적응이 안 되는데.. 이제 안양은 부천과는 다른 팀입니다. 씀씀이가 다르고, 자치단체와 자치단체장의 관심도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라인업도 다르고 모든 게 다릅니다. 비슷하게 살던 이웃이 돈 많이 벌어서 부러워하는 격이고, 나도 그렇게 부러워하고 시샘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그냥 우리에 집중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양 전 볼 자신이 없었는데, 안양은 안양이고 우리 친구들과 선수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정리를 하면 좀 위안이 될 것 같았는데, 안 되네요. 어제 경기 후 선수들이 팬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같이 좀 더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데, 참 어렵네요. 좋은 일은 참.. 쉽게 일어나지 않네요. 이렇게 끝날 리그가 아닌 것 같은데...
매번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대체로 동의하며 선수단의 경기력에는 2, 4번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한 경기 좀 잘하면 한 경기 못하고 그것이 반복되는 이른바 단짠단짠 경기력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선수들 개개인 플레이도)
일개 팬의 시선에서 봤을 때에도 단순히 지공을 넘어 너무나 전개가 느리고 어디로 패스를 할지 눈에 보이는 경기..
그 약체라고 부르는 안산전에 올시즌 1무 2패에 청주와 천안에게도 실점이 많았죠.
공교롭게 이영민 감독이 몸담았던 안양과 안산에 이상하리만치 많이 지는 거 보면 부적이라도 써야 되는지..
산술적으로 아직 2위까지 가능하다고 하는데 사실상 어제 종료 버튼 누르지 않았나 싶네요.
구단에서 알아서 잘 하겠지만 내년에 팀도 늘어난다고 하니, 지킬 선수 잘 지키고 빨리 내년 스쿼드 구축에 힘 썼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