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회가 만들어지고 글들이 우르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야기가 나온게 '오프라인 활동' 이었습니다.
글로만 하는게 아니라 직접 뛰어보자는 거.
그래서 조기축구회처럼 팀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가칭으로 'FC2002'라는 거 어떠냐고 제가 발제를 했고 다른 분들이 OK해 주셨습니다.
네 아시다시피 그때 대회개최지 결정은 안났지만 유치경쟁이 엄청 불 붙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2002라는 말을 팀이름에 넣자고 했는데 바로 OK사인 내 주시더군요.
모임은 연세대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있었습니다. 거기 조기축구회하고 같이 쓰면서 매주 주말에 모였습니다. 저는 어쩌다 한번 나가는 정도였고 정기적으로 나가지는 않았어요.
여튼 여기서 활동하는 많은 분들이 이후 제 뒤를 이어 대표시삽으로 계속 하이텔 축구동을 이끌어주시게 됩니다. 이렇게 동호회 활동이 하나 더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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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 축구동 초창기에 어떤 한 분이 가입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SOCCER KOREA' 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기억하실까요?
이거 기억하는 분 계시다면 진짜 올드팬이십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쓰고 있어서 '쇼핑몰 아니냐' 하실수도 있는데....
아닙니다.
당시 한국에서 인터넷 접속할 수 있는 대학교는 한손 안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가 다녔던 광운대학교였습니다.
그리고 SOCCER KOREA는 포항공대 호스트 쪽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엔 광운대의 네트워크 동아리 'K-NET'에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칭하다가 발견했다면서 저에게 알려줬습니다. K-NET은 당시 정식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네트워크실의 죽돌이/죽순이 들이었고 거기서 전 하이텔 동호회 시삽이라고 1기로 합류시켜 줬습니다. 거기서 전 인터넷을 처음으로 접해봤습니다. 어쨌던 한국 축구관련 인터넷 주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해서 슬쩍 돌아보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운영하는 분이 하이텔 축구동에 가입했다고 하시더라구요.
네, 포항의 올드팬이신 서동렬 님께서 운영하던 당시 영어로 한국 축구에 대한 소개를 올린 사이트가 바로 이 사이트였습니다. 당시 한국축구를 세계에 알리던 유일한 사이트였습니다.
그래서 한참 뒤인 2010년대에 제가 이글루스 에서 블로그 운영하면서 당시 이글루스 이용자들에게 문제를 냈었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에 인터넷에서 축구로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이 누구였을까? 하고 말이죠.
답은 바로 서동렬님입니다. 당시 축구관련으로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 두명은 바로 정몽준,서동렬 이 두분이고 차범근은 3위에 간신히 계실까였습니다. 그만큼 한국축구를 일찍부터 알리고 다닌 분이 서동렬님입니다. 1993,1994년만 따지자면 인터넷에서는 한국축구=서동렬 이었던 때입니다.
서동렬님을 필두로 한국의 축구정보를 세계에 알리는 분들이 하이텔 축구동에서 나왔습니다.
한국 인터넷 축구역사를 이야기 할 때 이분은 절대로 빠지면 안됩니다. 나중에 '최초' 이야기 할 때 이분이 알려주신 에피소드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세계에 축구정보를 알린 또다른 한분이 포항의 '스틸야드' 라는 이름을 선사한 이승수님이십니다.
포항의 '스틸야드'는 그냥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이승수님이 하이텔 게시판에 '스틸야드'라는 이름을 제안하셨습니다. 나중에 직접 만나서 '왜 하필 저울이야?' 라고 농담삼아 물어봤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스틸야드의 원래 뜻은 아는데 포항은 포철이잖아요. 그러니 스틸이고 야드는 경기장이잖아요' 라면서 웃었습니다. 해외에 있던 XX파크, XX야드 라는 말을 보고 부러움이 있었기에 제안한 거였다고요.
중요한 건 이걸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받아준거죠. 이런 '최초'의 제안들이 하이텔 축구동을 통해 계속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최초'의 서포터 커플 및 결혼1호도 이승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울산의 이혜은님과 결혼하셨습니다)
서호정기자가 쓴 기사에서는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 기사 잘못된 기사입니다. 그 때문에 나중에 그 기사에 소개된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자신이 1호 결혼이 아닌데 그렇게 기사 나가서 다른 형들에게 욕듣고 있다고 난감해 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금 밝히지만 서포터의 1호 결혼은 하이텔 축구동의 이승수-이혜은 커플입니다. 거기다 이 둘은 그 앙숙이라는 포항-울산의 서포터입니다. 이 둘은 1997년의 도쿄대첩에도 요요기 경기장에서 같이 응원하기도 했죠.
오랫동안 글을 쉬었던지라 한꺼번에 중구난방으로 나가게 되었네요.
중요한건 이런 '최초'의 기록들이 하이텔 축구동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이런 시작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하이텔 축구동이었던 겁니다.
적어도 2002 월드컵 직전까지 만들어졌던 여러 구단의 서포터의 토대는 전북을 제외하고는 하이텔 축구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초기의 왕성한 활동을 한 사람들은 다 하이텔 축구동에 한다리는 걸치고 있었던 분들이죠.
심지어 천안에는 지금 다른 서포터들이 계시지만 일화가 아주 잠깐 천안에 연고를 뒀을 때 만들어졌던 서포터도 있습니다.(천안 경기장은 그래서 K리그에서 또다른 진기록을 가진 경기장입니다. 이거 기억하는 분 계심 진짜 올드맨이십니다 ㅎㅎ)
'일레븐 플러스' 라는 서포터인데 이분들도 당시 활동하셨죠. 물론 지금 천안 서포터와는 너무 오랜 기간의 단절이 있기에 '일레븐 플러스'를 지금 천안 서포터의 시조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약간 소개하는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전신이라고 볼수는 없습니다.
여튼 많은 분들이 하이텔 축구동에서 여러 정보를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서포터'라는 용어를 도입한 분은 부산에 계셨던 박철효 님이십니다.(1995년 여름 경)
박철효님은 당시 일본을 여러차례 드나들면서 하이텔 축구동에서 알아주는 '일본통' 이셨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해외 정보를 빨리 알려면 서울에서는 명동 가야 했습니다. 명동에 있는 중국인 화상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서 판매되는 일본의 패션잡지를 위시한 여러 잡지 중에서는 축구잡지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들어온 '사커 다이제스트' 같은 잡지들을 번역해서 알고 계시는 분들이 최첨단 정보를 알고 계시는 분들이셨지요.
이런 것들은 기자분들도 마찬가지라서 당시 대한민국의 언론 등에 나온 여러 용어들이 '재플리시'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윙백으로 부르지만 당시는 '사이드 어태커'라는 용어를 쓰는 등 한국도 재플리시를 자연스레 쓰던 때였습니다. 당연하죠 정보의 창구가 없었으니까요. 아니 정확히는 일본쪽으로만 들어왔던 거니까요.
그래서 박철효님이 '서포터'라는 단어를 제안 하실 수 있던 거였습니다. 이미 J리그 창단 전부터 일본의 JFL은 1960년대의 JSL을 거쳐왔던 전통에 이미 승/강제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프로였어요.
이미 서포터 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어 있었기에 자연스레 제안해 주실 수 있던 거였습니다.
"단순 응원단이 아닌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다"는 것도 강하게 어필하셨지요. 이게 시기상으로 유공응원단이 활동하는 도중에 하이텔 게시판을 통해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1995년이 되어야 이야기가 나오는 거고 1996년 까지는 서포터라고 할 수 있는 팀 응원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1993-4년엔 그런 단어로 정착시키자는 이야기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ㅎㅎ
다시 1993년 이야기로 돌아와서 1993년 11월 말 경에 그 해를 정리하는 이벤트를 하나 하려고 저는 제안글을 올렸습니다.
"리그에서 BEST11을 많이 정하지 않았느냐. 이번엔 반대되는 '워스트 11'을 정해보는건 어떠냐?"
헐리우드에서도 보면 아카데미상 말고도 골든 라즈베리상이 있으니 그런거 함 해보자는 거죠.
언론은 할 수 없지만 우리 동호인은 할 수 있지 않냐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거 재미있다'면서 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취합해서 서병기 기자님께 전해드렸습니다.
서병기 기자님은 재미있어 해 주셨고 '하이텔 축구동이 선정한 이해 한국프로축구 BEST11과 워스트11'로 기사를 써 주셨습니다.
이건 대한민국 스포츠 어워드. 아니 모든 관련 상을 통해서도 '엽서투표' 라는 우편물 집계 외에 온라인에서의 여론을 모아서 투표하는 방식의 최초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엔 하이텔 등의 서비스를 통해 '올스타전 투표'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이텔 축구동/야구동이 생겼지만 이런 시스템은 쓸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고 어느 운영주체도 이런거 생각 못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참여숫자가 백명단위도 아닌 몇십명 단위였지만 최초로 '네티즌이 선정한 BEST'가 언론빨을 탔고 이게 최초였습니다.
하이텔 축구동의 가진 '최초'의 기록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선정은 오래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운영사건이 있기도 했고 이후 여러 여론참여 창구가 온라인에 생기면서 자연스레 사라진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이 베스트/워스트 선정에서 베스트와 워스트에 둘 다 선정된 유일무이한 분이 계십니다. 그것도 다른 연도에 따로따로 선정된 것이 아니라 같은 해에 동시에 선정된 분이 계셨지요.
현재 아산 감독을 맡고 계신 '가물치' 김현석 선수였습니다.
이분이 당시 FW분야에서 최고의 FW 2명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최악의 FW 2명중 한분으로 당당히 뽑히셨습니다.
왜냐면 출중한 활약을 보이신건 맞는데 플레이가 너무 거치셨거든요. 그래서 동시에 뽑힌 유일무이한 분이셨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다음글에는 또다른 '최초'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94년으로 넘어갑니다.
구단을 넘나들며 추억의 이름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일단 박철효 님이 1995년에 '서포터'라는 단어를 들고 왔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서포터'라는 단어가 팬클럽 세상을 지나 96년 즈음에 툭 떨어진 것 처럼 이야기하는 데 그게 아니라는 걸 말해 줍니다. 포항 서동렬님은 부천SK 연고이전 후 망연자실 해 있을 때 광화문에서 (아마도) 감자탕을 먹으면서 축구협회 김XX 씨와 함께 "K3리그가 있는데, 1년에 3억원이면 팀을 운영할 수 있다"는 정보를 줘서 팀 창단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으로 개인적으로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부천 서포터 오울드 이희천 님에게 "형. 1년 3억원이면 팀을 부활 시킬 수 있대"라고 전화를 걸었고, 이후 부천 서포터는 미친듯이 움직여서 팀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포터가 창단한 팀의 탄생입니다(2007년).
이런 부천 서포터가 걸어온 개척 행보를 생각나게 하는, 우리 응원가 가사 "끝까지 널 노래해. 우리의 붉은 자존심.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가 되어 갈꺼야"를 좋아합니다. 음은 창작이 아니라 다른 구단도 부르기 때문에 이 좋은 가사를 창작음에 앉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