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이 되었습니다.
1993년이 하이텔 축구동 만드느라 정신없이 지났습니다.
1993년 말에 PC통신에서 언론을 뒤흔드는 건을 제공했습니다.
일본 울트라 니폰이 걸어놓은 현수막 KEROA 였습니다.
물론 O와 E 자리에 바꿈을 표시하는 양방향 화살표를 붙여놓아 '오타'라는 것을 표시한 듯 했지만...
"이거 일본어로 '하인'을 뜻하는 게로아를 표현한거 아녀?" 라는 말이 나온게 PC통신의 SPORTS란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기자들이 웬만큼 이런거 아는 분들이 드물어서 이건거 잘 못잡아냈습니다.
아니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 SBS의 유튜브 채널에 나오는 고참기자인 '권종오 기자'가 만드는 영상 클립도 보면 이런 부분들은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유도영웅 다무라 료코의 별명 '야와라'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야와라'에서 따온 것을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예들은 수두룩합니다.
이런거 잡아내 준게 PC통신들이었기에 많은 언론에서 PC통신을 점점 주목하게 되고 'PC통신 이용자 의견'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둘씩 나오다가 1995년 넘어가면서 '네티즌 의견'으로 나오게 되죠.
여튼 '게로아'건은 하이텔 축구동의 작품이라고만 할 수는 없고 여러 PC통신 이용자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걸 전달을 한건 저였습니다.)
이제 1994년이 되자 미국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습니다.
대표팀은 1월부터 소집되서 2월에 미국으로 날라가 현지적응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축구동 부시삽 중 한명인 ToiEtMoi문선희 님이 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친분있는 선수들에게 물어봤는데 숙소 놀러오라더라. 간 김에 하이텔 축구동 채팅방에서 선수들과 채팅 한번 주선할까?"
어어???
PC통신의 다른 동호회들 중에서 몇개 동호회에서 이런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보통 게임회사의 게임 발표할 때나 MS나 HP 같은 큰 회사에서 부서 장이 개인 자격이나 회사 대리의 자격으로 제품설명회 같은 것을 온라인으로 이렇게 한 적이 있긴 했거든요.
근데 그건 IT관련 기업이었잖아요.
아니 근데 그게 가능해? 호텔방에서 PC통신을?
"호텔측에 물어봤더니 전화선 연결해 줄수 있대. 하이텔 단말기 들고 가면 되잖아"
지금은 잊혀졌지만 하이텔 사용할 때 전국의 전화국에 신청하면 하이텔 단말기를 줬습니다.
하이텔 단말기의 시작은 프랑스의 '미니텔'을 따와서 한 거였습니다.
은근 프랑스가 이런 부분 빨랐고 한국의 여러 시스템은 프랑스에서 도입한 것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지하철에서 썼던 '마그네틱 승차권'을 들 수 있겠네요.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표에서 가져온거죠. 1990년대 2000년대 초에 파리 가셨던 분들은 '어? 한국 서울/부산 지하철 승차권과 똑같네?' 하셨을겁니다. 소재까지 똑같아요. 10회권, 1달권 같은 경우도 색상/소재 똑같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그거 납품하는 회사가 SKC(선경화학)이었습니다. 현재 SK의 한 부분을 맡은 그 회사 맞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시스템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시스템을 SKC에서 알고 있고 표는 SKC에서 만들어서 넘겨주면 되니까요.
이미 1980년대에 프랑스의 '미니텔'은 전국 네트워크망 구축해서 프랑스 전역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판매 서비스도 하는 등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전화 발명 전인 나폴레옹 3세 시대에 세계 최초로 팩스 서비스 한 나라입니다. 팩스는 전화보다 먼저 발명된 통신기기입니다. 깜짝 놀라시는 분들 계실거 같네요.
아이고 사전 설명이 너무 길었네요.
PC통신을 한국에서 실행하면서 KT에서는 프랑스의 '미니텔'의 단말기를 고대로 도입한 '하이텔 전용 단말기'를 보급했습니다.
전국의 전화국에 가서 신청하면 무료로 대여해 줬고 고장나면 들고가면 새걸로 교체해 줬습니다. 나중에 필요없게 되면 반환하면 되었던 초기 PC통신보급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2400bps의 속도였고 자료실 다운로드는 안됐지만 게시판의 글을 읽고 채팅하고, 바둑-장기 두는덴 지장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pc통신만 접속 가능하게 한 특정목적의 펌웨어 컴퓨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앞의 전화번호도 따로 입력이 가능해서 말이 '하이텔 단말기'이지 천리안이나 나우누리도 접속은 가능하긴 했습니다. 물론 천리안과 나우누리에서 사용하는 독자 서비스들은 제대로 쓸 수 없는 '한계'는 있었지만요.
나중에 이야기 하게 될 'PC카페 칸타타'에서도 컴퓨터보다는 이걸로 PC통신을 서비스 더 했습니다.
이걸로도 게임을 멀티로 했었습니다. 요 부분은 PC카페 칸타타 이야기 할 때 더 해 드릴께요.
이거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무게는 좀 나가서 '들어다 줄까?' '현장에서 통신 할 수 있는 사람 없음 곤란할텐데...가서 도와줄까?' 라고 하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전화선 설치/연결 다 할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현장에 2개를 설치할 수 없으니 제가 사회자 맡으라면서 현장 오퍼레이터를 자임했습니다.
나머지 10명은 지원자 중에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지원자 선정은 게시물을 올리고 거기에 대한 답글을 다는 사람들을 고른 뒤 활동점수에 따라(시삽 메뉴에서 이게 지원 되었습니다.)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하이텔은 지금과 같은 댓글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댓글은 새로운 게시물에 말머리를 [Re:원게시물 번호] 라는 말머리 다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공지가 올라가자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습니다.
아...이럴줄 알았으면 평소에 활동좀 할걸 하는 하소연도 있었지만...어쩌겠습니까. 활동 많이 한 분에게 혜택 드려야 하는건 당연한 것이기도 하죠.
ToiEtMoi문선희 님은 행동력이 발군이었습니다.
이걸 혼자서 다 해결해 냈고 당일날 해당 시간보다 먼저 제가 방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은 비밀방으로 만들었고 선정된 10분에게는 미리 메일로 비번을 알려드렸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질문은 미리 제가 받아놨고 참가하는 분 10분은 자기가 또 질문하고싶은 것을 질문 할 기회를 드렸어요.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당시는 지금같은 핸드폰 서비스가 없던 때였습니다. 조마조마하며 ToiEtMoi ID가 접속해서 대화방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어요. 걱정 많이 했었습니다.
대화방에 ToiEtMoi ID가 들어오자 대화방은 난리가 났습니다.
와! 선수들과 멀리서지만, 얼굴은 못보지만 메시지를 받아볼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답답하더라도 이게 가능하다고? ㅇㅇ 가능해! 지금 하고 있잖아!
PC통신의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지금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스포츠 스타가 최초로 온라인에서 팬미팅을 한 건이었습니다.
1994년 2월 초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팬미팅이 보도된 것은 1994년 6월 17일(로 기억합니다) 스포츠서울이었습니다.
실은 바로 보도했다간 김호 감독님에게 '니들 이거 뭐한거야?' 하고 혼날까봐였습니다.
김호 감독님은 이 소식 전해들으시면 이제야 아실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몇번 개인적으로 만났지만 이때 이야기는 해 드린적이 없어요...ㅎㅎ
왜냐면 이게 호텔 로비에서 한게 아니라 선수들 호텔방에 들어가서 몇몇 선수들 모아놓고 한거였거든요.
(참가해 주신 분은 서정원 선수를 비롯한 1992올림픽 대표선수들 위주였습니다만...뭐 그 당시 그분들이 유명한 분들이긴 합니다)
기사를 써 주신건 서병기 기자님이셨습니다.
한국 경기가 한국시간으로 18일 오전 8시30분에 열렸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하루 전인 17일에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사회면에 써 주셨어요.
스포츠 서울에선 당시 1면은 대표기사. 2-4면은 KBO, 5면 또는 5-6면이 축구가 기본이었습니다.
월드컵 때니까 월드컵이 1면부터 쫘악 배열되었지만 축구기사들이 넘치는 판이라 맨 뒤면인 15면쯤에 따로 사회면으로 넣어주신 거였습니다.
이 기사에서 PC통신 축구동을 또 소개해 주시면서
"PC통신을 하는 축구동호인들은 동호회 게시판에 여러 글을 올리면서 한국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며 글들의 제목들, 그리고 여러 내용들을 전해 주시면서 "이들은 지난 2월 선수단 숙소에서 선수들과의 온라인 채팅을 통해 질문/답변과 함께 선수들에게 격려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라며 보도를 해 주셨지요.
지금 보니 그보다 앞선 '온라인 선수 팬미팅'은 없었습니다.
2400bps라는 속도와 DOS라는 OS한계가 있었지만 여러가지를 해 내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94년은 하이텔을 비롯한 한국의 PC통신 속도가 2400bps/mnp 라는 것이 아닌 4800bps를 본격적으로 지원해 주게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9600bps 라는 4배속도로 올라가게 되면서 대용량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자료실에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행한 것들이 gif로 만들어진 짧은 동영상이라던가 여러 음원자료들, mid로 만든 pc노래방 자료들, 여러 잡지들 스캔한 것들이 올라오게 되죠.
1994년은 다음 도약을 위한 큰 발판이 되어준 해였습니다.
원석님 기억력은 국가대표급입니다. 보도나 게시물을 통해 또는 전언을 통해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것을 또렷하게 기억해서 풀어쓰다니.. 그리고, 역사를 정리하다보니 축구 팬 사이드에서의 '최초'들이 하나씩 언급되네요. 오늘은 한국 축구과 선수의 최초 온라인 팬미팅. 내용을 보니 낭만적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