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월드컵을 통해 하이텔 축구동은 한 단계 도약을 했습니다.
이런 기사가 나올 때 마다 가입인원은 한번 점프(?)를 하게 되었고 더불어 기존 언론이나 기업들이 PC통신에 게시판이나 여러 서비스를 하나하나 열게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봐야 아직 회원수 천명도 안되던 시절...)
축구동에서도 여러 게시판 활동을 하는 터줏대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신동일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이 해이기도 합니다.
제가 1994년 여름에 '낫소'에 입사해서 직장인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직접 뵙게 되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였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노안이다보니 신동일 선생님께서 절 처음 만났을때 첫번째로 하신 소리가 "당신 72년생 맞아?" 였습니다. 자기 또래처럼 보였다고 말이죠 ㅎㅎㅎㅎ
이렇게 1994년부터 회원들끼리 서로 만나서 축구장 가서 경기 본다던가 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 아시안게임 보러 간다는 분도 계셨어요.
아마 서로가 몰랐지만 같은 경기를 경기장에서 보고 있던 분들도 꽤 되었던 때였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과의 괴리랄까요? 게시판에서 싸우다가도 직접 경기장에서 만난다던가 해서 화 풀고 했던 건도 있었습니다.
1995년 초에 저의 인생에 엄청난 획을 그은 일이 있었습니다.
축구가족의 김신기 편집장님이 "원석씨 혹시 축구관련으로 인터뷰 할 인물 없을까?"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만화가 오일룡 선생님 어떨까요?"
축구가족에 매달 인터뷰 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대부분 축구협회 관계자나 은퇴선수들 이야기만 나오다보니 뭔가 다른 인물을 인터뷰 하고 싶으셨기에 저에게 아이디어를 물어보셨던 거였겠죠. 고민끝에 내린 답이었습니다.
왜 그분이냐고 물어보셔서 "그분 축구만화만 그리시는 분입니다. 굳이 축구선수 출신이나 축구팀 관련 인물만 인터뷰 하지 말고 가끔 이런 분도 올라오셔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답하니 혼쾌히 승락해 주셨습니다.
인터뷰는 정작 제가 했습니다. 바쁘셔서 저보고 취재 부탁을 하시더군요.
일산에 있는 오일룡 선생님의 작업실에 가는데 근처까지 가서 오일룡 선생님의 제자분의 차를 타고 선생님의 작업실에 갔습니다.
당시 일산은 지금처럼 완전 개발된 때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파트들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전부 다 지어지진 않았고 벌판인 곳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자가용이 없던 저로선 대중교통으로 근처까지 간 뒤에 절 픽업해 주신 거였습니다.
오일룡 선생님 만나러 가기 전에 축구가족으로부터 축구가족 잡지 몇권과 함께 1994년 월드컵이 끝나자 축구협회에서 만든 소책자 '1994월드컵'을 가지고 갔습니다. 축구협회가 1994 아시안게임 끝난 이후 당시 한국과 미국 현지 신문들의 기사를 모아서 만든 기사모음집으로 만든 리뷰 소책자였습니다.
오일룡 선생님은 절 보자마자 즐겁게 맞아주셨습니다.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하셨어요 만화관련 잡지나 기관지에는 실린적이 있지만. 축구협회 기관지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고 취재 나와준다고 해서 약속도 미루고 만나는 거라면서 좋아하셨습니다.(나중에 스포츠서울에서도 서병기 기자님이 인터뷰를 재차 하셨습니다)
준비한 질문 답변을 하면서 궁금한 부분들도 이야기 드렸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춤추는 센터포드]를 보면서 저도 축구에 많이 빠졌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들 인물은 전부 삼국지 인명을 그대로 쓰시더라..."부터 시작해서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끔가다 보면 축구 룰을 틀리시는 것도 많아 봅니다. 그리신 플레이 중에서는 현실에선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축구 규칙 때문에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라고 하니 허탈하게 웃으시면서 답을 해 주셨습니다.
"몰라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거에요. 축구를 일반인이 그리는 거니까... 나야 조기축구밖에 더 해봤겠어요? 그런 자세한 부분을 모르니까 그렇죠. 알려줘서 고마와요.이렇게 알려줬기에 알게 된거지 안알려줬으면 몰랐을거야"
그러며 저를 '축구만화 스토리작가'로 만든 결정적인 말을 해 주셨어요.
"오늘 가져다 주신 책자만 해도 우리 작가들은 구할 수 없는 자료에요. 축구를 잘 그리고 싶고 멋지게 그리고 싶어도 그런 자료들이 진짜 없는거야. 가끔가다 명동가서 일본 잡지 사는거, TV 보는거 말고 자료가 없어요. 이런걸 알려주는 분들이 만화 창작에 도움을 주셔야 하거든요. 우리 기자님이 만화 좋아하시니까 우리 작가들을 도와줬음 좋겠어요"
당장 그 자리에서 "저 만화 엄청 좋아합니다. 도움이 된다면 돕겠습니다!"
라고 답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스노우볼이 굴러갔습니다.
1995년 가을에서 겨울 접어들 때 서울문화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현재 서울문화사는 '서울미디어코믹스'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이때 저는 하이텔의 애니동(go ani. 애니메이트 동호회)에서도 활동하고 했는데 이때 축구동 대표시삽이라는 것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애니동 대표가 신일숙 선생님과 친분이 있었고 신일숙 선생님 작업을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 알고 연락 주신 거였습니다.
"만화가 신일숙 선생님이 축구관련 만화를 그리시려고 하는데 자료조사를 도와달라"
신일숙 선생님 하면 한국 순정만화의 거장이시기도 하고 한국 게임사의 빅 히트작이자 한국 PC방을 만든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리니지' 의 원작자이십니다. 마침 연락받았을 때는 '리니지'를 연재중이기도 하셨죠.('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끝낸지 얼마되지 않으셨을 때였습니다)
중편을 기획중인데 주인공을 축구선수, 그것도 독일 분데스리가의 선수로 설정하고 싶다면서 자료조사를 요청하셨던 거였습니다.
마침 스포츠서울에 독일 잡지들이 많아서 그걸 복사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문제는...당시엔 컴퓨터 스캔이 일반적이지도 않았고 신일숙 선생님의 댁에 컴퓨터가 없던 때였어요.
제가 자료조사 도와드릴 무렵 해서 작업용으로 컴퓨터를 작업실에 들이셨습니다. 일산의 한 아파트(엄청 넓은 아파트)에서 작업실을 운영하셨을 때였습니다. 이때 '비비 아이리스' 작가인 김강원 선생님과 같이 아파트를 쓰고 계셨어요 문하생들은 두 작업을 왔다갔다 하면서 운영하던 때입니다.
방문해서 신일숙 선생님으로부터 작품의 시놉시스를 듣고, 필요한 자료들을 들은뒤에 해당 자료들을 구했습니다. 당시 스포츠서울에 마침 독일 잡지가 들어와 있어서 허락을 받고 복사(컬러복사)를 해서 넘겨드리고 작품에서 나오는 여러 축구동작에 대한 시연,(턴 어라운드 같은 것들) 심판 시그널에 대한 시연을 했습니다. 제가 시연하는 모습을 선생님은 그걸 스케치 하신 뒤에 작품에 반영하셨죠.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화이트' 라는 순정만화 잡지에 1996년 1월부터 연재되었습니다.
'루딘 나이츠-천사가 내리는 숲' 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분들 정도 되어야만 알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렇게 '축구만화'에 발을 담갔습니다.
그리고 더 큰 스노우볼이 굴러가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에 IQ점프에 연재된 축구만화 '미들맨' 의 작가 박산하 선생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박산하 선생님은 당시 '진짜 사나이' 라는 만화로 인기 절정의 작가셨습니다.
신일숙 선생님의 만화를 도와드리면서 아쉬웠던 것이 신선생님의 그림체가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순정만화 작가시다보니 역동적인 연출, 그림체가 주는 박진감 등이 떨어졌죠. 신선생님 본인도 아쉬워 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액션 정말 잘 하는 만화가가 축구만화를 그리다보니 이에 대한 글을 축구동에 쓰기도 했죠.
거기서 "박산하같은 액션 잘 그리는 만화가가 스포츠 만화를 그리면 진짜 박력넘칠거다!"
그런데 저에게 정말 연락이 온 거였습니다!
신일숙 선생님을 소개해 준 애니동 시삽에게 "축구만화 기회가 있으면 더 참가해 보고 싶다. 지금 아이큐점프에 미들맨 연재되던데 작가분 도와드리고 싶은데..."라고 했는데 진짜 연결시켜주신 겁니다.
박산하 선생님은 안산쪽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어서 안산의 전철역에서 만나뵈었습니다. 이야기를 포장마차에서 했던 기억이 나네요.
미들맨을 도와드린건 얼마 안됩니다. 중간에 제가 낀 형태가 되다보니 스토리 작업이나 여러 컷의 디테일에 참가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이를 통해 축구만화에 제가 깊게 발을 담그게 됩니다.
이때 만화잡지계는 서울문화사와 대원 이라는 두군데가 다였습니다. 육영재단의 '보물섬'은 당시 폐간 직전이었던지라 사실상 서울문화사와 대원 두군데의 대결이었는데 이때 시공사가 만화잡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만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지도 모르는 Xen(쎈) 이라는 잡지죠.
당시 박산하 선생님은 시공사와 전속계약 맺기 직전이었습니다. 사실상 발표만 남기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당시 편집자인 전인호 편집장에게 절 소개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전인호 편집장을 소개 받은 뒤에 여러 스토리를 만들어 갔는데 만화스토리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소설처럼 쓰는 스토리 원안을 함 만들어 봐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게 1996년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구상을 하는 도중에 1997년 1월인가? 2월인가에 전인호 편집장님이 시간 있냐면서 절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분이 전세훈 선생님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슈팅'은 만화잡지 '챔프'에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이야기 하지만 전 그 작품 좋게 보지는 않고 있었거든요. '너무 과장이 심한데...' 하고 말이죠.
근데 그거 만드는 분이 제 앞에 있네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전세훈 선생님은 웃어주시면서 축구관련 소개 받았다면서 반겨주셨습니다.
슈팅 연재를 하는데 스토리 초안을 잡아달라고 하셨던 겁니다.
에에?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 드렸습니다. 너무 과장이 심한데 전 그 부분 용인 못한다고 정말 제대로 된 스포츠 그득한 '슬램덩크'같은 만화 만들어 보고 싶다고. 정말 리얼리티 넘치는 스토리 써보겠다고.
아 좋지~ 좋아요~ 하면서 이렇게 셋이 뭉쳤습니다.
그리고 전세훈 선생님은 이후 절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집에서 PC를 잡고 타이핑하고 심지어는 사진하는 후배의 작업실에서도 타이핑했습니다(이건 슈팅코리아때의 일입니다만...ㅎㅎ)
일단 아시아대회의 기본을 잡고 지역예선의 설정, 각 본선진출국의 예선에서의 스코어를 잡았습니다.
혹시 '슈팅' 만화 가지고 계시거나 e-book으로 보실 수 있는 분이면 보시면 아시겠지만 만화 중간중간에 '어느 조 경기결과'에 대한 표들이 쫘악 나오거든요. 그거 제가 아래한글에서 작성해서 뽑아간 것을 만화 원고에 붙이신 거였습니다! ^^
1996년에 비해서 1997년에 제가 경기 많이 보러 안다닌 이유는 만화 '슈팅'의 스토리 집필과 만화 작화 관련해서 지방을 많이 다니고 전세훈 선생님 모시고 여러 경기장에서 라카룸에서의 진행도 보여드리고 선수단 숙소까지 취재하게 하는 등의 일들이 많았어요. 이러다보니 1997년부터 부천 서포팅은 많이 빠지게 되었죠.
그걸로 절 비난하던 분들도 계셨는데 그때는 싸우기 싫어서 밝히지 않았지만 지금에서야 밝힙니다.
이렇게 현실 취재가 반영되고('슈팅'초기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나동태와 현철석의 '사이벡스 대결'은 전세훈 선생님이 선수들이 하는 사이벡스로 하는훈련을 직접 보시고 넣은 거였어요) 하이텔 애니동이나 축구동에서 호평이 올라오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당시에는 그 만화 스토리 쓰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분명 제가 쓰고 있다는거 알게 되면 '이런 이야기 넣어달라, 저런 이야기 넣어달라'고 해서 스토리 엉망으로 만드는 건 싫었어요. 스토리는 전적으로 저와 전세훈 선생님과 대화하고 나온 거였습니다. 선생님이 이미 잡으신 인물설정은 바꿀 수 없었기에 경기 플롯을 잡으면서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집어넣고 이걸 다 풀어낸 뒤에 다른 팀과의 전적을 다 엮어놔야 했거든요.
2002월드컵을 구상한다고 하면 조별리그 48경기+토너먼트 16경기= 64경기를 모두 경기결과를 내놨고. 여기서 더 자세한 사항을 만들어 내야 했어요. 그래서 그중에 한국팀 경기를 어디에 위치시킬까를 정했습니다.
이걸 계속해서 전세훈 선생님과 상의했습니다. 그래서 출전한 팀들 중 어느 팀을 한국팀과 붙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팀에 대한 세부적인 인물사항들을 정하고 그 디테일을 제가 또 가져가면 거기서 상의해서 수정사항 다시 가져갔죠...
이걸 만화 '슈팅'에 나오는 3개 대회를 돌린 겁니다. 청소년대회 아시아예선, 청소년대회 세계대회, 2002 월드컵의 모든 경기들을요.
경기결과를 배치한 뒤에는 상대 선수들중 중요한 선수들을 설정하고 그 선수들에 대한 디테일로 들어가고 여기서 또 기-승-전-결 을 만들어내서 경기의 스토리를 짜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진짜 제가 생각해도 '미친 짓'을 한거죠. 이렇게까지 스토리 디테일하게 들어간 스포츠작품은 없던 걸로 압니다. 적어도 한국 작품들 중에선 이정도로 스토리 잡은 작품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다른 여러 회고에서도 '슈팅'이라는 작품에 대해선 '그 작품은 내 목숨 꺼내서 썼다. 진짜 내 피로 쓴 작품이다' 라고 했을 정도거든요.
지금도 전세훈 작가님의 그때의 맘은 모르겠습니다.
혼쾌히 승락해 주셨지만 이후에도 많은 부분에서 제 고집을 누르시는데 고생 좀 하셨거든요
전세훈 선생님이 '마구' 요청을 할때 최대한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 드렸습니다.
그게 나이지리아경기에서 나온 '너클 킥' 이른바 '무회전 킥'을 보여줬죠. 이거 진짜 현실에서 마구급이고 드리블하면서 슈팅 쏘는 사람 몇 안된다고 프리킥에서나 맘대로 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진짜 그렇게 차면 공이 춤을 춘다고 설명드리자 "야 그거 좋다! 당장 쓰자"하면서 '코브라 슛'이라고 명명하셔서 작품에 나오게 된거죠. 그런데 그 이후에는 '마구'요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이전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축구만화와 달리 리얼리티가 강조되었고 초거대히트작인 '슬램덩크'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원안은 16강 까지만 가는 걸로 설정했었는데 전세훈선생님이
"원석씨. 결승 가자. 우승 시키자. 만화니까. 만화니까 가능한거 아냐? 만화가 너무 리얼리티를 따질 필요는 없어. 우린 르뽀나 회고만화를 그리는게 아니잖아. 꿈을 이루는 거야. 그게 만화야"
고민끝에 저도 OK했습니다.
"어떡하던 최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IQ점프에서 '월드컵 가상 시나리오'라는 걸 써 줬었습니다. 이때 잡지 발매일이 한국vs멕시코 경기 이후라서 네덜란드,벨기에 전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써 줬거든요. 이때 처음엔 한국vs네덜란드는 0:6 패배, 한국vs벨기에 경기는 0:2 패배를 예상했거든요. 이 때문에 당시 선수출신이었던 하이텔 축구동 회원들이라던가 기자분들, 현역 선수들에게 심한 소리좀 들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깨지겠냐고...
그래서 결국 잡지사의 요청으로 조금 바꿨습니다 네덜란드전은 2:4 패배. 벨기에전은 2:2 무승부로 경기 막판 무서운 추격전을 벌이고 뒤집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쉽게 못했다 고 말이죠.
이런 글만 쓰고 만화 시놉시스도 이러다 보니 전세훈 선생님이 절 설득시키기 위해 세번이나 이야기 하셨어요. 그래서 결승가서 우승하는걸로 시나리오를 바꾸고 다시 16강부터의 경기를 죄다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4강전은 승부차기. 한번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넣었습니다.
머릿속은 정말 복잡했습니다. 몇차례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연습장은 몇권 날렸죠.
그렇게 완성한 시놉시스였습니다. 전세훈 선생님은 제가 머릿속에서 그려낸 것들을 너무나도 멋지게 그림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그 바람에 본인이 생각한 여러 장면들을 넣기 힘드셨을 겁니다.
처음과 달리 엄청나게 길게 진행되는 바람에 월드컵 직전까지 무려 5년을 연재했습니다. 전세훈 선생님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연재될줄은 몰랐다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작품 질을 유지시키는데 엄청 힘드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마지막 줄 쓰고 Alt+P를 눌러 프린트 한 뒤에 진짜 24시간을 잤습니다. 깨니까 몇분 안지나 있길래 '아이고 잠깐 졸았나' 했는데 다음날이더라구요...ㅎㅎ
이렇게 고심하고 2002년 경기 결과를 거의 맞췄다고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고 덕분에 전세훈 선생님은 "지금도 날 축구만화 작가로 알고들 있더라"며 투정을 부리십니다.
슈팅 32권 마지막의 날개페이지의 '작가의 말'에 그래서 제 이름이 들어가 있고 저도 잠깐이나마 두세컷 정도 나옵니다. '양기자' 라고...ㅎㅎ
이후 2006월드컵을 앞두고 '슈팅'의 스핀오프 작품인 '슈팅 코리아에서도 전세훈 선생님이 불러주셨습니다. 2002월드컵 끝나고 스포츠조선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일간지 연재가 생각보다 힘드셔서 결국 전세훈 선생님은 일간지 연재를 포기하시고 단행본만으로 작품을 만들게 되시죠. 이것도 결국 제가 스토리 플롯과 시놉시스를 맡아서 끝까지 갔습니다.
저 미친 시뮬레이션 짓은 더 크기가 커졌습니다. -_-; 분데스리가에다가 포칼에다가 유로파에 챔스까지...
결국 '슈팅 코리아' 이후 만화 스토리/시놉시스는 더 손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슈팅 코리아는 2006년에 부천만화대상 청소년만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슬램덩크에 도전한다'는 20대의 패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슬램덩크'는 넘지 못했습니다.
그만한 명작이 '슬램덩크'이죠. 그래도 '슬램덩크'라는 명작과 비교라도 되는 만화로 여러 차례 만화관련 언론에 기사화 된적이 있고 무려 '네이버캐스트'에도 분석 소개해 준 기사가 올라왔습니다(현재는 지식백과의 '한국만화정전'에 수록됨)
뒤에서 투덜대지 말고 직접 참가한다는 맘으로 준비하다 보면 그 기회는 언제인가엔 옵니다.
그게 하이텔 축구동이 걸어온 길이기도 했습니다.
뒤에서 말로만 온라인에서 키보드로만 하는게 아니라 실제 참가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한 실력과 준비는 하는 것.
이런 생각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1995년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이번 글은 만화 이야기만 했는데 이제 1995년의 다른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