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시즌이 끝났지만 아직 이야기가 더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즌이 끝나자 연고이전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당시 서울은 일화, LG, 유공 이 세팀의 공동연고지였습니다.
서울을 연고지에서 빼고 일본 J리그처럼 '공동연고지'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김현회 기자가 논쟁을 일으켰으니 결국은 취재 부족을 드러낸 바도 있었던 사안인 '수도권 공동화정책' 이 이때 일입니다.
1994년부터 이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알고 1996년에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방을 다 빼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1995년 말에 연고지를 새로 정해야 했는데 유공은 부천으로 연고지를 정했죠. LG는 안양으로 정했고 일화는 천안으로 정했습니다. 이걸 놓고 '유공이 꼼수 부렸네' 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부천은 관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스타디움'이 없었습니다. 부천시민회관 옆에 있는 '시민운동장'이 다였습니다. 그때 '공설운동장'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지금은 잔디밭이지만 그땐 맨땅이었고 콘크리트로 한면만 좌석 올라갔던 때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당시 부천으로 축구팀이 오자 부천 토박이 내지는 오래 사신 분들 중 조기축구회 등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대환영 하셨고 이분들 중 일부가 PC통신에 가입하셔서 축구동 활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 중에 ID를 AG909로 쓰시던 송관성 형님이 생각나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아서 방문해서 부천의 여러 조기축구회의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하고 하다보니 알게 된 사정이었지요.
여튼 '부천에 경기장 짓기 전까지는 서울 목동 구장을 사용한다' 는 방침이 나오자 "어떻게든 서울에서 경기 하기 위해 꼼수 부린거다" "아 그래서 다른 두개 구단보다 먼저 발표한거구나...선빵 날렸네" 라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글이 길어지겠지만 '서울 연고지 제외'관련은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김현회 기자가 '수도권 공동화정책'이라는 표현으로 기사를 썼지만 그게 잘못된 사실임에도 당시 많은 팬들 사이에 진실로 받아들여졌던 이유가 저같은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싶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로까지 나왔던 이야기였어요. 그거 하나만 대면 끝나는데 결국 공문 보내고 이전 정책들을 연맹에서 돌아보고 하는 난리가 났는데 이거 신문기사 몇 개만 대면 끝나는 문제였거든요.
그만큼 옛날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다보니 지금도 타팀의 올드 서포터들이 저를 아예 '증언자'로 지명하기도 하고 붉은악마 관련 옛날 이야기 나온다 하면 당시 분들이 "양원석이 방송 출연시켜라"로 거의 의견일치가 되었습니다.
제가 머릿속에서 이런 거 바로 뽑아내고 나중에 레퍼런스 찾아내도 거의 차이가 없다보니 '증언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전남 서포터의 경우는 제가 써준 글을 '전남 서포터 히스토리'의 첫 장으로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여튼...
'서울 연고지 제외'는 J리그의 발전을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당시 축구협회, 프로연맹의 분들의 여러 시도 중 하나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현재의 리그 체제가 정착되기 전에는 몇년간 매년 리그 우승을 가리는 방법이 달랐던 적도 있습니다.
한국프로야구처럼 '전/후기'로 나눠서 각각의 기수 우승팀이 연말에 챔피언 결정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때도 있었고 단일리그로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플레이오프 방식도 쓰고 다양했습니다. 정신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런 여러 경험과 시행칙오가 있었기에 현재가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 J리그 시작 때에 도쿄를 연고지 지정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게 도쿄 중심의 '메갈로폴리스' 지역 위주로 형성된 일본 프로스포츠의 대형 시장 사정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 프로야구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둔 한신 타이거즈나 후쿠오카 중심인 곳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도쿄 근방 메갈로폴리스 지역. 우리로 따지면 수도권 지역 중심으로 팀들이 몰려있습니다. 한국 사정으로 따지면 서울/부천/인천/성남/안양/안산/의정부/고양/구리/광명/과천 정도에 야구팀 대부분이 몰려있는 거였습니다.
엄청난 수도권 집중화를 가지고 있던 것이 일본 프로시장이었죠.
이 반대를 찔러보자는 것과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초대형 구단을 가지고 있는(현재도 '일본인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교진팬과 안티교진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입김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요미우리는 프로축구에서도 '1등'을 하기 위해 베르디 팀을 만들었고 J리그 창립 직전까지 '왕조'를 세울 정도로 JFL을 휩쓸었습니다.
당시 미우라 '카즈' 카즈요시를 일본 프로선수 중 종목불문하고 최고 연봉자로 만든게 요미우리 신문사입니다. 대놓고 "제대로 판 키우려면 스타를 만들어야지! 스타를 만들고 관심받게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최고연봉자'를 만드는게 먼저다!"라는 마케팅을 벌였습니다. 미우라 본인도 당시 '한 7천만엔 정도 줄려나?' 했는데 요미우리에서 '너 연봉 2억엔' 이라고 해서 입 쩍 벌어져서 말을 못했다고 회상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미우리 신문사가 J리그를 쥐락펴락 할 기세가 되다보니 J리그 준비위원회와 싸움 나서 요미우리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도쿄 연고 공동화'를 대놓고 시행했습니다. 결국 요미우리는 도쿄 입성을 포기하고 가와사키로 갔지만(가와사키 베르디) 나중에 도쿄 가스가 J리그에 입성하면서 도쿄 연고지를 인정받자 결국 가와사키를 버리고 도쿄로 다시 왔을 정도로 도쿄는 큰 시장이었습니다.
(도쿄 가스는 1997년 이야기 하면서 한번 더 언급될 것이긴 합니다)
J리그는 결국 도쿄라는 큰 시장을 아예 버릴 수는 없어서 '중립경기' 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리그를 총 3라운드로 진행시켰고 홈/어웨이 외에도 도쿄 국립 카스미가오카 경기장(일명 '요요기 경기장'으로 불렸죠)에서 치르게 했습니다.
아참! 1990년대에 동대문에서 연속경기 치뤘다고 뭐라 하는 분들 계시지만 이거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요기에서 여러 번 경기 열린 것 중 하루에 2번 경기 치뤄진 적도 있고 심지어 '도쿄대첩' 전날에도 우라와 레즈가 J리그 경기 치루기도 했습니다. 이 경기 끝나고 관중 다 내보내고 다음날 대표팀 경기 보러 온 분들은 경기장 앞에서 텐트치고 하룻밤 보낸 분들도 있을 정도였어요. 어떻게 알고 있냐면 당시 원정 보러 갔을 때 한국과 경기가 전반기 하일라이트이다보니 테레비 도쿄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경기관련 뉴스와 분석 등을 계속 보여주는데(이때 월드컵 예선이 테레비 도쿄가 독점중계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도 이때는 MBC가 독점중계권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요기 경기장 현장이라면서 요요기에서 텐트치고 자는 서포터 분들을 쌩으로 인터뷰 하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그 방송에서는 붉은악마의 당시 대표 신인철 형님과 교포-한국에서 온 응원단이 내일 경기를 위해 회의하는 회의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카메라 못들어갔다는 것 까지 방송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했어요.
어쟀건 J리그의 이 정책은 엄청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걸 상징하는 것이 일본의 1994년 광고대상을 받은 카피가 J리그가 광고한 광고카피였습니다.
"당신의 집 앞에도 J리그가 있습니다"
이게 뭘 뜻하는 것이냐면 수도권 집중되어 있는 프로야구와 달리 일본 4개 섬에서 모두 1개 이상의 프로축구팀이 연고지로 있기 때문에 프로축구를 보러가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로스포츠 보러 가기 위해 머~얼리 도쿄나 오사카 후쿠오카까지 안가도 된다는 걸 이 한마디로 끝내버린거죠.
야구의 단점을 딱 찝은 거였죠.
이런 성공을 보다보니 '우리도 함 해보자'는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한국은 일본을 많이 따라가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막말로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이 부산 시장에 풀린 뒤에 다시 한국 전체에 유행한다는 말이 당시에는 정설이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한국도 가장 큰 도시가 아닌 중소도시 위주로 연고지를 정해보자는 움직임이 컸습니다. 여기서 예외는 부산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았던 대우 로얄즈 정도입니다.
전 유공이 연고이전을 한다면 '인천'으로 올 줄 알았습니다. 인천에는 숭의구장도 있고, 팀 훈련장도 숙소와 연습구장은 용현동에 있던 인천 저유소(상암동 문화비축기지처럼 석유 저장하는 곳입니다. 주유소 오타가 아니에요 ^^; 현재는 아파트단지로 바뀌었습니다.) 유공은 한때 숭의구장에서 홈경기를 했던 적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부천이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를 생각해보면 부천영상단지 안에 전용구장 또는 종합운동장을 짓고 들어간다는 청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부천영상문화단지 옆의 상동호수공 원-웅진플레이도시 이 두 군데 중 하나가 축구장이 들어가는 것으로 기획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쨌건 당시 보도에는 부천영상단지 안에 축구장이 들어가는 것으로 기획은 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전용구장 건립 논의는 부천축구의 거대한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1995년의 리그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 대학로에 있는 'PC통신 카페' 칸타타의 관리자가 되서 카페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박중현 형에게서 '원석아 우리 송년회 해야겠는데 칸타타에서 할수 있나?' 하고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1994년에도 송년회를 대학로 인근의 작은 카페를 빌려서 했었습니다. 그때 사회를 '서포터'라는 말을 제안주신 박철효 형님이 마이크 잡고 하셨습니다.
이때 프로 심판분도 오셨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한때 심판위원장도 하셨던 손종덕 심판님께서 하이텔 아이디 만드셔서 가입하셨어요. 그래서 송년회에 오셔서 여러 이야기도 나눴었습니다. 이분도 나중에 심판분들이 독립적인 행보를 하는데 나선 분이시긴 했는데 당시 심판들에 대한 불만을 현장에서 생생히 듣고 가셨었지요.
어쨌건 제가 칸타타의 관리자가 된 이후 PC통신의 여러 모임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했습니다. SPORTS란에 칸타타 운영 제가 한다면서 광고 비슷하게 글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 문화 중에서 영화나 음악이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인데 칸타타에서 주말이면 일본영화/일본애니/일본음악 팬클럽들이 모여서 영상 상영회와 팬클럽 모임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주말은 2시간-3시간 간격으로 시간 단위로 모임들이 계속 있어서 정신없던 때였습니다.
송년회 일정을 빼기가 쉽지 않을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1월 15일경부터 대놓고 '12월 주말 저녁은 송년회만 받을 예정입니다' 라면서 영상 상영회를 오후 4시 이후에는 아예 안 받았습니다.
하이텔 야구동에서도 1995년 송년회는 칸타타에서 했습니다. 하이텔 축구동과 1주일 차이였습니다.
하이텔 축구동의 1995년 송년회는 12월 15일 금요일에 열렸습니다. 당시 준비 때문에 며칠전부터 하이텔 축구동 운영진인 오기환 형님이 고생하셨습니다.
송년회 사회는 누구로 할거냐를 놓고 당시 '축구여신'으로 불렸던 MBC의 이매리 캐스터가 맡기로 했습니다. 남자 사회자로는 현재 수원 삼성의 프런트로 근무중인 이은호군이 맡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축구동 회원분들 및 초대한 구단 관계자분들이 오셨습니다.
유공이 부천으로 왔을 때 부천 중동에 전용구장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게 더 진전되지 못하고 부천종합 완공 후 사용으로 결정된 것이 부천 축구의 아픔입니다. 이제 다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전용구장이 건설되었다면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억력이 국가대표급인 양원석님의 오늘 글에는 당시 일본 프로야구 이야기도 나오는 등 TMI의 향연인데 ㅋㅋ , 오늘 글의 주요 흐름은 "95년 부천SK(유공 코끼리)가 당국의 결정에 따라 서울에서 부천으로 옮겨왔다"는 것이고, "서포터 문화가 태동하던 시절 하이텔 축동 사람들은 대학로의 칸타타라는 카페에서 모임을 하였다"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으로 논의를 위해 상기할 것은 이미 95년 중에 하이텔 박철효님의 제안으로 축동에서 이미 '서포터'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글에 전남 서포터 소갯글은 양원석님이 작성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응원 품앗이를 하던 95~97년 상황을 반증하는 내용입니다. 품앗이를 나간 원석님이 그 순간 전남 서포터가 된 것이 아니라 문화가 태동하던 시절 PC통신 친구였던 분들이 다른 구단을 돕는 정도였습니다. 이는 부천 전남 뿐 아니라 다른 당시 존재하던 K리구 구단의 오울드들은 흔히 했던 일입니다. 아무튼 당시 원석님이 오지랖이 대단해서 지금도 당시 이야기를 듣고자 할 때는, 심지어 타 팀 팬들로 부터도 원석님이 지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