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들어온게 있어 1995 시즌 이야기를 더 하게 되었습니다.
하이텔 축구동의 유공구단 응원이 몇달지나지 않아서 여름철이 되었습니다.
여름철이 되자 응원단의 일선에서 뛰던 몇몇분들이 "동대문에서만 응원하지 말고 지방에도 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실행을 한 것입니다.
당시 수도권 팀 외에 구단이라면 포항/울산/부산/광양/전라북도 를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당시 전북 구단은 현재와 달랐습니다. 전북이라 불리긴 했지만 홈 경기장에 지금 전주월드컵 경기장이 아니다보니 전북의 몇몇 곳을 다녔습니다. 실제로 제가 1996년 아디다스컵 부천vs전북의 경기를 보러 간 곳은 이리공설운동장입니다. 이리는 지금의 익산입니다. 뭐 전주 부근이라면 전주 부근이지만요.
이분들이 가고 싶어했던 곳은 포항이었습니다.
당시 포항은 하이텔 축구동 회원들에게 있어서는 '꿈의 구장' 이었거든요. 개장된지 5년밖에 안된 새삥이기도 했고 종합운동장이 아닌 축구전용구장의 그 맛. 여러분들도 아시잖습니까? 근데 그 당시는 광양과 포항 딱 둘만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광양보다는 포항! 이었지요. 그 이유는 당시 광양은 조명탑이 없던 때입니다. 놀라실것 같지만 광양에 조명탑이 설치된 것은 개장 이후 좀 되서였습니다. 그래서 여름철 야간경기를 보려면 역시 포항이었지요!
그래서 여름철에 유공 경기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주말경기때에 시간이 맞으면 응원가는 분들이 계시게 됩니다. 이때부터 '서포터의 원정응원'이 부천응원단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응원을 주도하고 참가를 많이 (몇분은 개근하셨죠) 한 분들의 대부분이 수원 서포터로 1995년 말에 이동하셨습니다만 이 때는 부천서포터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서포터라는 말은 박철효님의 제안으로 쓰이기 시작했기에 응원단과 서포터라는 용어가 혼재해서 쓰이던 때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포터는 PC통신 내에서는 서포터로 통일해서 쓰였지만 언론보도에선 스포츠 서울 외에는 '응원단'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지상파 방송 송출에서도 당시 하이텔 회원들이 중심이 된 서포터들도 '응원단'이라고 중계하는게 흔했습니다.
이 부분이 '서포터'로 확정된 것은 절대적으로 신문선 해설위원님의 공입니다.
이분이 지상파 방송에서 '붉은악마'의 응원을 "PC통신 축구동 축구팬들이 응원 서포터를 만들었다"라고 방송에서 계속 언급해 주셨습니다. 이게 1996년 8월 이후입니다.
1996년 8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후 밝히겠습니다만 이 이후 신문선 해설위원께서 중계방송을 하실 때 우리들이 보이면 무조건 '서포터'라고 해 주셨습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TV방송의 위력은 대단했거든요.
거기에 MBC가 1998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TV중계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중계 때에 20명 정도 밖에 경기장에 가지 않은 경기에서도 붉은악마에 대한 단독샷이 여러번 나왔습니다. 월드컵 예선 되자 더했죠. 이런 중계마다 신문선 선생님은 '하이텔 PC통신 축구동호회 회원들이다' '이분들 기존의 응원단과 달리 '서포터'로 불러달라며 더 큰 선수들에 대한 지지와 신세대 응원을 하는 사람들이다' 라고 방송 멘트를 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여쭤보니 방송사 카메라 감독에게 부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서포터'와 '하이텔 PC통신 축구동호회'에는 큰 홍보이자 결정타였습니다.
그래서 도쿄대첩 이전 까지는 '서포터'와 '응원단'이라는 용어가 언론에서 섞어서 나오던 때라 보시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경기장에 오는 사람들이 신기해서 '당신들은 누구냐' 라고 물어볼 때 대답으로도 [서포터입니다] 라고 하면 못알아듣고 가는 분들이 대부분도 아니고 다였습니다. [저희는 PC통신으로 모인 응원단입니다] 하면 'PC통신이 뭐요?' 하고 또 물음이 왔고 '컴퓨터로 하는 겁니다 20대 이상들이 많이 해요' 라고 답변을 또 해야 했습니다.
서포터 이야기를 설명하면 '그거 응원단 맞네. 왜 서포터라고 하는거야?' 하는 식으로 끊임없는 문답을 해야 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pc통신을 하는 분들도 생겼지만 이해 못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구단 알바로 아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아니라고 하면서 '그래서 서포터 라는 말을 하는 거다' 라고 해도 그분들 입장에선 [신기한 사람들]로 보이기 딱이었던 때입니다.
그러니 1995년부터 PC통신 안에서는 '서포터'로 불렸지만 밖에서는 '응원단'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 스포츠서울만이 '서포터'로 써 준게 다행이었습니다.
글 시점이 점프되지만 1997년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 드리죠.
도쿄대첩이 끝난 뒤 대표팀 경기 일정이 잠깐 빌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여러 방송에서 '붉은악마'를 출연시켰습니다. 그중 하나가 HBS(현대방송)의 '열전! 갑론을박'에 출연했습니다.
축구와 야구 어느것이 더 좋은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사회자는 원종배 라는 분이었습니다.
당시 원종배 아나운서라고 하면 차분한 방송운영으로 유명한 분이었어요. 스타 아나운서였습니다.
방송 전에 붉은악마측 게스트로 참가한 남건욱님이 '저희는 응원단이 아닌 서포터로 불러주세요' 라고 방송에 요청하자 원종배 사회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응원단이나 서포터나...같은 말 아닌가요?"
1997년 도쿄대첩 끝난 뒤에도 이정도였습니다.-_-
원종배 이분이 1997년에 43세셨습니다(1954년생이심) 당시 사회의중심인 30-40대에게 있어선 응원단이건 서포터건 뭔차이야? 뭔 말이야? 왜 구분을 해야 해? 였던 겁니다.
방송으로 엄청 '서포터'라는 말이 알려졌는데도 이정도였어요. 이거 사라지는건 1998년 월드컵때의 여러 메스컴을 타면서 '서포터'라는 말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반상식이 된 거라 봐야지요.
이런 상황에서 '1997년 말미에야 서포터 이름 생긴' 거라 폄하하면 안될 부분입니다.
이런 혼재된 용어사용에 대해서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다시 1995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당시 지역연고제 정착을 위해 '서울 공동화' 정책과 함께 또다른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지역명 우선 표기' 였습니다.
서울 공동화 정책과 함께 구단 이름에 연고지역명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고 이전의 '구단이름'은 지역명 뒤로 빼야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TV방송에서도 캐스터와 해설자 분들이 지역명과 구단명을 막 섞어 쓰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그나마 잘 지켜준게 스포츠서울이었고 다른 신문/언론들은 지역명/구단명이 막 섞여쓰였어요.
그나마 스포츠서울은 서병기 기자님을 통해 이런 부분을 이야기 드렸고 당시 김덕기 체육1부 팀장님이 잘 받아주셔서 딱! 지역명으로 통일시켜주셨습니다.
스포츠 서울 관련 이야기는 나중에 한번 더 써야할 것 같군요.
이번 이야기에서도 한번 또 나옵니다만...
어쨌건 이렇게 당시는 용어표기가 혼재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때문에 '도쿄대첩'은 당시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을 역전승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은 한국축구문화에도 큰 역할을 한 진정 '대첩'이라 할만한 경기입니다. 다른 '도쿄대첩'들은 1997년 9월 28일의 도쿄대첩에 비교할 바가 못된다고 단언합니다.
여튼 1995년 여름으로 돌아오면.
이때 지방경기장을 가서 응원하던 분들이 어느 날 "울산에서 큰일을 당했다"라면서 글을 올렸습니다.
한태일군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글을 올렸는데 내용을 종합해보면.
"부천응원을 하는데 울산경기장 곳곳에서 욕설 뿐 아니라 소주병 투척도 당했다. 누군가가 던진 소주병에 맞을 뻔 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아 존나게 시끄럽게 지랄치네'
'여기가 어딘줄 알고 현대 아닌 팀을 응원해?'
등등의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긴 울산이야!' 하면서 누군가 팔을 휘저었는데 그 뒤에 근처에 '퍽!'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소주병이었다는 글도 올라왔습니다.
...이게뭐냐 싶었죠.
당시 울산에 사시는 HYOBI박준협님이 미안하다 죄송하다고 글을 올리셨지만 다른 분들은 '준협님이 무슨 잘못이냐. 사과 안하셔도 된다'면서 소주병을 던진 분에 대한 분노가 게시판을 채웠습니다. 박준협님은 현장에서도 계셨고 현장에서도 바로 엄청 미안해 하셨습니다.
전 바로 스포츠서울의 서병기 기자님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로 기사화 해 주셨습니다.
스포츠서울에 기사가 바로 나왔습니다. 기사제목이 아마 '응원했다고 이렇게까지...' 라는 기사로 기억합니다.
이때 상세한 내용은 바로 제가 하이텔 게시판의 글들을 바로 출력해서 스포츠서울에 들고갔습니다.
마침 제 컴퓨터에는 잉크젯 프린터가 연결되어 있었고, 집에서 스포츠서울이 있는 시청옆 프라자센터까지는 버스로 한시간 안에 갈 수 있던 거리였습니다.
서병기 기자님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바로 기사를 써서 올려주셨죠.
놀라실 일일지 몰라도 당시 기자분들 앞에 PC는 있었지만 모뎀이 달려 있어서 PC통신이나 인터넷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몇년 뒤인 2000년이 되서야 된 일이고 기껐해야 LAN 네트워크로 기사작성에 대한 것만 사내통신망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몇몇 기자들은 자신들의 노트북에 자기 전화선을 빼서 연결하는 고수급들도 있었지만 이건 대한민국 활자언론사들을 통으로 뒤져봐야 50명도 채 안되었을 시절입니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더 있었습니다. 1996년이 되자 당시 하이텔의 유공 응원을 하던 분들 중 수원으로 응원하는 팀을 옮기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1996년 아디다스컵은 저도 원정응원을 다녔습니다.(1995년의 원정응원엔 전 참가하지 았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혼자서 낛시대에 부천 깃발(당시 보라매가 마스코트로 잠시 있던 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보라매는 부천시의 상징새이죠) 매달고 경기장가서 휘두르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저도 소주병을 맞았죠. 동대문 경기장 말고 다른 경기장에서 응원구호를 외치고 깃발을 휘두르면 이상한 놈 취급 당했습니다. 알바비 얼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은 기본 패시브였어요.
그나마 게시판에 제가 '이번에 어디 갑니다' 라고 올리면 하이텔 축구동 분들이 나와주시기도 했습니다. 경기장과 먼 거리에서도 나오셔서(영천 사시는 분이 포항에 오셔서 반갑다고 한 적도 있고 광양 갔더니 진주에서 두시간 걸려서 왔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같이 응원하기도 하고 응원하는걸 보고 나중에 경기장에 가서 응원해 보기도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아마 다다음글? 정도쯤에 그 이야기도 하겠지만 당시는 이렇게 현재의 응원방법이 알음알음 퍼져나갔습니다.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드릴 수 있는데 까지 도와드렸고 경기장에서 계속 만났죠.
1995년의 움직임은 '유공' 이라는 구단을 응원했다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한팀만 응원하는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신기하게 보시던 분들이 하나둘 이야기를 하고 친분이 생기면서 이분들이 먼저 '어이 다음 경기에서 우리 같이 할까?' 하면서 다음 경기를 같이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땐 자신들이 좋아하는 팀들을 응원하기도 하고 권하신 분들 앞에서 응원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한분두분 PC통신을 사용하는 분이 아님에도 우리를 도와주는 분들도 만나기 시작하고 그렇게 응원방식이 퍼져나간 겁니다.
응원 방식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다른 팀을 응원하는 경우가 생긴 거죠.
심지어 그거 보려고 지방에서 동대문으로 하이텔 축구동 회원 분들이 오시기도 했습니다.
이걸 단순히 '팔도응원단' 이고 '좋아하는 팀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장똘뱅이들' 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요?
이분들이 1997년 도쿄대첩 이후 대거 서포터로 들어오셔서 지금의 초석을 쌓은 걸 생각한다면 이 당시의 '여러팀 동시응원'을 폄하한다는 것은 안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도쿄대첩때 김포공항의 출국장에서 붉은악마에게 싸움 거신 한 분은 1998 프랑스 월드컵 때 저희와 같이 한달동안 같이 고생하시면서 열심히 응원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현지에서 같이 X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기장에서 같이 응원하는 분들이 한분 두분 늘어났죠.
어떡하던 한분이라도 더 PC통신하지 않는 분들이라도 축구를 보는 다른 방법으로 또 다른 즐거움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이렇게 '같이 응원'하게 된 겁니다.
당시 동대문에서 유공 응원을 하다가 수원으로 간 분중에서는 광양에 한달넘게 사시면서 전남 서포터의 선구자인 고 박숭범형님과 같이 광양에서 여러 학교 앞에서 전단지 돌리고 육교에 현수막 달고 응원도 같이 했던 분까지 계셨어요.
1996년 이야기를 하면서 할 이야기인 '쇼케이스'에서도 전국 여기저기서 부산에서 모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동대문에서 그리고 목동에서 우리를 도와준 분 중 대표적인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이분을 아실 분도 계실 겁니다.
'뺀질이 아저씨'로 불린 전명준 형님이십니다.
전명준 형님 관련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겠지만 명준형님은 당시 축구장에서 꽤 유명인이셨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화팀 서포터 레전드급 인물중 한분이셨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응원하는 것에 대한 안좋은 소리를 당시 '동대문 아저씨들'에게 들으셨지만 "젊은 애들이 유럽 스타일대로 응원한다는 거잖아. 재들이 축구장에서 나쁜짓을 했냐? 보고 듣고 있음 좋지 않아?" 라면서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996년 이후부터는 직접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1996년 이야기 하면서 풀어보겠습니다.
1995년 원정 이야기는 어떤 분께서 요청하셨기에 급히 쓰게 되었습다만.
관련해서 궁금했던 이런 부분들 중 제가 이야기 드릴수 있는 부분은 계속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저도 기억을 꺼내서 쓰는 것입니다만 가끔가다 놓친 이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일깨워주시면 그 때의 기억을 다시 꺼내서 쓰면 이 시리즈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렇게 여름방학때와 여름 휴가시즌에 시작된 원정은 이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다니게 된 거였죠.
울산의 소주병 맞은건 1997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냐고요?
1997년에도. 그것도 도쿄대첩 이후에도 울산에서 소주병 맞은 축구동 회원님들이 계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만...
정말 지금의 응원이 자리잡는데엔 너무 힘들었던 때입니다.
* 2024년의 마지막 날에 이 옛날 이야기의 19번째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 2025년에도 계속 올리겠습니다. 1992년부터 시작해서 이제야 간신히 3년차의 이야기 정도를 끝내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하나하나 계속해서 써 보겠습니다.
**** 처음 몇명이서 네트워크에서 그냥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경기장에 축구가 좋아서 오는 분들을 보며 그냥 행복합니다.
***** 우린 축구를 좋아하고 이 팀이 좋아서 경기장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 2025년에도 축구장에서 봅시다.
오랫만에 하이텔 축구동에서 쓰던 말꼬리를 다시 써 보겠습니다.
- Studio Jurassic Park
- because it is there
작은 글을 즐겨주시는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항상 잘 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