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SK 시절.
장비 관리사로 활동하셨던 김요한님은
현재 소모임 아이레즈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최고 서포터 헤르메스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
2003년 2월 첫째주 어느날.
나는 우연히 부천 축구단에서 장비관리사를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강 유니폼이나 축구공 관리해주면 되겠군 이란 생각으로 이력서를 보냈는데 단박 연락이 왔다. 모레부터 출근할 수 있습니까? 전국을 다 돌아다녀야하는데 가능합니까? 군대는 다녀왔습니까? 이 질문 3개가 다였다.
SK본사에 갔다. 지금도 기억나는 사무국장의 얼굴은 매우 고압적이고 굳어있었다. 자신 스스로를 군인출신이라고 소개한다.
“왜 우리팀에서 일하고 싶습니까? 어느 선수를 좋아합니까?”
난 첫번째 질문보다 두번째 질문의 답에 공을 들였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윤정춘. 촌스런 이름만큼이나 토속적인 외모를 가진 이 선수는, 니포축구의 한 중심축으로서 내가 처음으로 유공경기를 보러갔을때 결승골을 넣었던 그 선수다. 당시 대표팀 축구밖에 몰랐던 난 윤정춘이라는 플레이어의 매력이 흠뻑 빠졌었다...
구단에서 일한지 3일째 되는날, 나는 선수들이 없는 틈을타 사우나실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윤정춘 선수를 만났다. “제가 축구장을 처음 간 날, 정춘이형이 결승골을 넣었어요.” 라고 말하자 윤정춘 선수는 그 경기를 정확히 짚어냈다. 결승골 넣은 경기가 몇개 안된다면서. 사람좋은 웃음과 함께.
이제와 얘기지만 윤정춘의 플레이스타일은 거칠지 않다. 그가 프로선수 내내 퇴장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좋아하는 투지넘치는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본 윤정춘은 축구머리가 좋은 선수였다. 상대선수가 거친 반칙을 하기 전에 이미 패스의 맥을 잡아놓고 공을 전달하는 능력이나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자제하는 그야말로 괜찮은 선수였다는 생각이다.
선수들은 나를 퍽이나 신기하게 바라봤다. 선수들 입장에선 용납될 수 없었던 몸매 때문이었다.
“몇킬로예요?”
구단에서 일한지 1주일동안 말한마디 안걸던 남기일 선수가 나에게 건 첫마디가 그거였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이원식 선수도 같은 것을 물었다.
당시 100킬로가 넘는 내 몸무게는 두고두고 선수들의 놀림이나 화제거리가 됐고, 나중에 얘기가 나오겠지만 ‘김요한 살빼주기 프로젝트’를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물론 결론적으로 당시 15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 감량이 있었지만 지금은 도로 원상복귀가 됐다.
부천구단의 클럽하우스는 구단 역사만큼이나 낡았다. 뒤로는 거대한 기름탱크들이 늘어서 있고 앞에는 야구장과 잔디구장 3개가 있다. 동양화학의 매연이 이따금씩 날아오는 뭐 그런 곳이었다. 더구나 선수들의 유니폼이나 운동복을 빨아야 하는 세탁실은 비좁기 그지없는 창고였고, 축구공이나 콘, 연습용 허들 등은 복도에 그냥 쌓아뒀다. 복도 앞에는 선수들의 축구화며 운동화, 슬리퍼가 어지럽게 놓여있고 클럽하우스 전체에 땀냄새가 옅게 배어있다.
클럽하우스 내에서 가장 비싼 것, 그래서 관리를 세심하게 해야 하는 것은 (선수들 몸값 빼고) 축구공이었다.
개당 16~18만원까지 하는 그 공들은 항상 하루 두번씩 갯수를 세어놓아야했다. 그래도 꼭 두어달 지나면 한두개씩 사라졌다. 지금도 축구공이 왜 없어지는지 난 잘 모른다.
또하나는 디아도라에서 지급되던 연습용 유니폼과 운동복인데 하절기 동절기 다 합치면 1인당 종류만 10가지가 넘었다. 때문에 선수들은 싸인펜으로 자신의 옷에 작게 이름을 쓰거나 등번호를 써놓는데 그래도 없어진다.
후배가 선배옷을 잘못입었다가 욕을 먹기도 한다. 선배들은 후배옷을 곧잘 훔쳐입기도 한다. 내가 일하는 동안 몇몇 지인들은 유니폼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껏 아무렇게나 관리되던 디아도라에서 주는 모든 운동용품의 관리체계를 세운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 2003. 3.23 첫경기 (vs. 부산과의 홈경기)
부천서포터가 서포팅을 보이콧했다.(이유는 다 아니 생략) 선수들은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안승인 선수와 최정민 선수는 당시 “서포터가 없으니까 허전하고 뛸맛이 안난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단 프런트의 태도였다.
모 관계자는 “무시해. 어차피 자기손해인데”라고 말해 나의 분노를 샀지만 그걸 서포터들에게 이를수는 없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서포터들의 그 ‘언더스탠드?’ 흰 통천은 구단 프런트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였다.
트르판 감독은 일찌감치 서포터들이 자신에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트르판은 2003 시즌 시작 이전부터 터키로 돌아갈 준비를 한 것 같다. 대부분의 훈련을 당시 하재훈 수석코치에게 맡겼으니까.
트르판 감독의 통역은 아흐멧 이라는 터키사람이었다. 한국에 유학을 왔던 이 형은 인간성이 무척 좋았고 또 한국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단체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일이 없는날도 나와서 허드렛일을 돕곤 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는 그 역시 한국말이 유창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감독의 말을 효율적으로 전하는데 한계가 있어 보였다. 트르판 감독의 지시도 가장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다함께 열심히 뛰자, 협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 패스하기전에 우리편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고 해라, 과감히 슈팅해라, 콜플레이에 신경써라, 자신감을 가져라...”
나라도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는.
선수들은 항상 경기전에 커피를 마신다. 그것도 프림없이 블랙으로 진하게. 경기장에 도착해 제일먼제 짐을 풀고 커피를 탄다. 커피가 근육의 글리코겐 손실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덜 지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잔디를 밟으며 잔디컨디션을 체크하고 돌아온다. 상대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몇몇 서포터들이 통천을 내걸고 있는 장면을 보면 선수들이 그 통천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윤정춘 : “요한아, 저기 저게 무슨소리냐. You... never....”
나 : “아, 그거 당신은 혼자서 걷지 않는다....그러니까 함께 뛰고 있다는 서포터들의 뜻이죠.”
첫경기는 나름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제 첫경기일뿐인데 뭐...라고 난 생각했지만 이것이 그 암울했던 시기의 시발점일 줄은 미처 몰랐다.
가물가물해가는 기억으론 진경선, 김성철, 김동규, 최형준 등 느닷없이 주전을 꿰찬 신예들과 안승인, 남기일, 이원식, 윤정춘, 박성철 등 니포축구를 맛본 선배들과의 호흡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친하기는 했지만 냉정히 평가해볼 때 중앙 미들을 맡았던 신현호의 실력은 K리그의 그것에 비하면 수준이 높지 않았다.
정해성 감독 부임 이후 주가를 올린 김기형과 신승호 등은 트르판 감독 밑에선 후보에 불과했고 장신 공격수 박성철 머리에 공을 맞춰 떨구면 남기일, 다보, 이원식이 받아 먹어야하는 단조로운 패턴은 상대팀에 금새 간파됐다. 김한윤 - 최정민 등으로 이어지던 수비라인 역시 체력문제와 상관없이 뻥뻥 뚫렸다.
다오는 부상이었고, 제임스와 패트릭은 해외에서의 실력이 다 발휘되지 않았다. 무스타파는 부상을 이유로 터키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당시 부천은 부산과 대전에게 내리 0:1로 2연패를 당했다. 골가뭄이 문제가 아니었다. 골로 이어질 수 있게끔 볼을 운반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나의 서포팅을 했다. 장비관리사란 직업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선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서포팅이라 생각했다.
선수들은 훈련때 입는 옷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듬뿍듬뿍 넣었다.^^
인천지역 모임인 아이레즈가 있다는 사실도 이때쯤부터 알았다.
당시 부천은 전열을 추스르고 나름의 맹훈련을 가지며 울산 원정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이 울산 원정경기에서 그만 선수들의 눈물을 보고 만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