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SK 시절.
장비 관리사로 활동하셨던 김요한님은
현재 소모임 아이레즈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최고 서포터 헤르메스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계속해서 연재 됩니다. ^^
=============================================================
2003년 3월30일 울산문수구장.
부천은 이미 2골이나 먹은 상태였다. 몇 안되는 부천 원정서포터들의 침묵속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경기는 풀리지 않았고 분명 선수들은 헉헉대고 열심히 뛰었지만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트르판은 자리에서 한번 일어나지 않은채 침묵속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일어나봤자 할 얘기가 없었을 것이다. "빨리빨리", "천천히" 등 기본적인 한국어 조차 못했으니까.
경기전날 부천팀은 울산 모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매니져가 조용한 식사 장소를 따로 내줬고 기념공을 들고와 선수들의 사인을 부탁했다. 보통 윤정춘과 이원식 등은 독방을 썼고 나머지는 2인1실을 썼다. 그 업무는 김갑배 주무님이 맡아했는데 어떤 규칙이 있는 듯 했다.
트르판은 한국에 있을 동안 내내 한국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선수들과 따로 테이블에 앉아 다른 메뉴로 식사를 했다. 다만 패트릭이나 제임스, 다보 등은 한국음식을 그런대로 먹었고 특히나 불고기는 무척 좋아했다. 호텔에서는 대부분 뷔페를 먹기 때문에 대강 골라서 먹을 수 있었는데 선수들은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았다. 과일을 많이 먹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이 얘기만 나오면 불끈하는 두식이가 생각난다. 담배얘기다.
내가 선수단과 일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점이었다. 담배를 피우면 폐활량에 분명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기본상식이지만 하루 1갑 이상을 피우는 골초도 있었다는 것은 참 특이한 일이다. 프로선수로서 자기관리가 엉망이 아니냐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사랑해마지않았던 이원식 선수 조차 애연가였다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까.
담배를 피우지 않던 김기형 선수는 이런 얘기를 한다.
“담배 니코틴이 쌓일 새가 없던 것 아닌가? 매일 뛰잖아. 담배 피우는 선수들이 헉헉대고 못 뛰는 걸 본적은 없어.”
어쨌든 팀 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선수는 남기일, 김기형, 외국인 선수들, 이동근, 김동규, 진경선, 최현, 한동진과 몇 명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수들은 호텔에 가면 어느 특정 선수방에 모여 함께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선수들에게 담배를 빌려주거나 꾸었던 기억도 난다.
난 특별히 제재할 생각은 없었다. 선수들은 선수 자신의 몸에 대해 누구보다 잘안다.
신승호 선수가 주전으로 도약하기 위해 담배를 끊고 그야말로 열심히 훈련해 결국 주전으로 도약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컨트롤에 대해선 군소리가 필요없는 거였다. 안승인, 이원식 등 애연가들은 여전히 팀 내에서 100미터 최상위권 기록을 가지고 있고 쿠퍼테스트 같은 것도 상위권으로 통과하는 양반들이었으니까 담배와 운동선수와의 상관관계는 지금도 모호하다.
0:2로 지던 울산과의 경기가 후반 중반을 넘어설때였다.
다보가 넘어지며 패널티킥을 유도한다. 1골을 따라붙을 수 있는 상황. 키커는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경기전 작전대로 키커위치에 섰다.
제임스는 정말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늘 유지되는 엄청난 근육과 보디라인. 강철같은 허벅지,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슈팅의 강도도 막강했다. 그리고 매너도 매우 좋았다.
터키 트라브존스포르에선 엄청난 포스를 내뿜었다고 한다. 몸싸움에선 지지 않았고 유연했으며 또한 강력했다. 그래서 구단관계자들도 싼값에 보물을 건졌다고 좋아했다.
그런 제임스가 패널티킥 실축을 했다. 울산 서동명이 제임스의 슛을 막아버린 것이다. 인사이드로 키퍼의 왼쪽으로 공을 밀었지만 서동명이 예측을 해버렸다. 제임스의 낙담하는 표정이란.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순간 트르판의 표정이었다. 보통 패널티킥 실축이 나오면 감독은 노발대발해야하고 혹은 아쉬운 듯 물병을 내려치거나 던지거나 뭐 그래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트르판은 엷은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 안통하니 물어볼 수도 없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윙크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감독에 대한, 팀에 대한 열의가 이미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역전의 발판은 예상외의 선수에게서 나왔다. 후반에 실수로 한골을 먹게만든 장본인. 수비수 김동규가 울산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보기에도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린다. 그리고 다보의 멋진 다이빙 헤딩슛. 스코어 1:2. 선수들은 다보로 몰려갔다. 시즌 개막이후 3경기만에 첫 골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경기 이후 선수단은 호텔로 돌아가 식사를 했다. 3연패를 당한 선수들의 입맛이 좋을리 없고, 분위기가 좋을리 없었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최현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버스 앞에서 김동규를 나무란 것이다. 첫실점의 이유가 김동규 탓만은 아니었지만 상대선수를 놓친 김동규의 플레이가 결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뭐, 선후배 관계 철저한 한국 축구판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나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수비라인 전체를 관장하는 골키퍼 입장에서 눈에 빤히 보인 신인 김동규의 실수를 지적해주고 싶었던 맘도 이해한다.
그런데 김동규가 울기 시작했다. 안승인, 이원식, 윤정춘이 다가오며 말렸다. 최현은 왜 우냐고 소리치고.
지긴 했지만 프로데뷔 3경기만에 첫 공격포인트를 올린 김동규는 진 경기의 탓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김동규의 분한 마음은 따로 있었다.
김동규는 경희대 시절, 촉망받던 선수였다. 예전 대표팀의 유상철 같은 존재랄까. 최종 공격수부터 최후방 수비까지 골키퍼 빼고는 다하는 선수였다. 김동규가 3학년 시절, 전국 춘계리그에서 그는 후반에만 출격하는 이원식 처럼 스윽 나타나 동점, 결승골을 작렬시키는 등 해결사 역할을 하며 우승을 했다.(아니면 준우승...기억이...)
당시 경희대는 나름 최강이었다. 현재 인천에 있는 이준영, 부천에서 활약한 이동근, 최형준, 김동규 모두 경희대였다. 그중 김동규는 이동근과 함께 모두가 인정하는 플레이어였다.
김동규 자신은 수비수보다 공격형 미들이나 공격수가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천에 와서 맡은 것은 윙백이었다. 끊임없이 사이드로 파고드는 발빠른 상대 공격수를 마크해야 하고 중앙공격수와 호흡을 맞춰 상대선수들과 경합을 벌여야 하는 자리다.
“감독이 맡기는 자리에서 충실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이건 뭐 선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니....나를 윙백에 갖다 놓으면 안될 건데....”
김동규의 푸념이 아직도 귓가 들리는 듯 하다.
어쨌든 울었다는 이유로 경상도 사나이 최현은 한동안 김동규를 갈궈댔고 이런 작은 삐걱거림들이 모여 선수단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줬다면 그 부진과 절망의 22연속 무승이 조금은 이해가 될까.
울산과의 원정경기에서 지고 난 이후, 라커룸에서 제임스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제임스가 좀 까만가. 덩치는 작은가. 그런 그가 패널티킥 실축이 곧 패배로 이어졌다는 죄책감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몰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주섬주섬 선수들이 벗어놓은 유니폼을 챙기다가 우연히 그 눈물을 봤고.
최선을 다한 사내의 눈물은 진하다.
이후 수원에게 0:1로 패한 이후 트르판도 생각이 있었는지 김동규의 자리를 한칸 더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부천은 극심한 골 가뭄에 허덕이고 있었고 슬슬 언론에선 4연패의 부천을 걱정(?)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선수들이 흘리는 땀을 직접 보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이것을 이겨낼 것이라 믿었다. 골이 터지기 시작하면 좋아질 것이라 믿으면서.
2003년 4월12일, 성남과의 홈경기.
어머니 생신도 챙기지 못하고 경기장으로 (일하러)갔다. 기억이 맞다면 서포팅이 이즈음 다시 시작됐다. 부천서포터의 목소리는 정말 우렁찼고 경기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나도 덩달아 신났다. 일이 힘든지도 모르게.
장비관리사는 평소 선수단의 유니폼과 운동복 관리가 1순위 업무다. 그밖에 훈련용 도구와 공, 가방을 챙기는 것과 새로운 선수가 오면 배번에 따른 유니폼 지급, 운동복 지급도 내몫이었다.
경기장에선 주로 트레이너들을 도왔다. 물병도 건네고 수건도 준다. 아무렇게나 벗어놓는 운동복도 가방에 넣는다. 추울때는 교체되서 나오는 선수들에게 돗바를 건네기도 한다.
그런데 난 부천경기장에서 한번도 선수단 좌석에 앉아본 일이 없다. 자리가 모자라서였다. 다른 경기장은 대부분 함께 앉아 있는데 부천만 유독 그랬다. 그건 좀 아쉽다.
어쨌든 서포팅 덕분인지 무려 2골을 넣었다. 시즌 첫 멀티골. 그러나 실점이 4개나 됐다. 이제와 얘기지만 김도훈이란 공격수는 적어도 K리그 안에선 참 좋은 스트라이커 였다. 수준급의 체격과 골에 대한 집중력, 그리고 파괴력까지. 물론 주워먹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주워먹는것조차 되지 않았던 부천 입장에선 김도훈의 존재는 무거웠다.
이 경기에서는 비밀이 한가지 있다. 바로 최거룩 선수의 첫골인데, 핸들링 반칙이었다. 문전에서 높이 뜬 볼을 왼팔로 주르륵 흘러내리게 컨트롤 한 것인데 마침 골대뒤에 있던 나는 그 장면을 정확히 봤다. 문제는 심판도 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슬프게도 어차피 경기에 질 부천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어진 4월27일 광주와의 경기 1:2 패배는 지금와선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날 하재훈 수석코치가 선수단을 따로 불러 맹비난했던 기억은 남는다. 트르판이 하지 못하는 선수들 정신력 강화에 드디어 나선 것이다.
또한 군발이 팀에게도 졌다는 서포터들의 맹비난도 있었다.
4월30일 대구와의 홈경기는 우리가 첫 승점 1점을 기록한 날이다.
1점을 먼저 실점한 부천은 또다시 패배의 기운이 드리워있었다. 대구선수들은 신생팀 답지 않게 무명의 투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당시 선수단 사이에서는 대구 박종환 감독이 프로선수고 뭐고 그냥 ‘빠따’를 내리갈긴다는 소문이 있었다. 스파르타식 훈련에 고등학생도 안한다는 숙소에서의 외출허락, 외박허락 등은 선수를 완전히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리팀은 골결정력 부족, 수비불안, 패스미스, 투지실종, 조직력 와해 등 축구팀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서포터들의 욕설이 본격화된 것도 이 즈음이다.
여기서 한가지 되짚어볼 문제가 있다.
바로 서포터들의 욕설인데, 좋은 선수들 키워 팔기만 하고 투자는 하지 않는 구단의 처사와 투지가 실종된 선수단의 모습은 충분히 욕설을 퍼부을만 하지만... 관중수가 급감한 것이 단지 구단의 잘못된 행태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성철 선수 와이프와 안승인 선수 와이프의 친구 가족이 애들을 데리고 경기장을 찾았다가 질겁을 했다.
“서포터들이 너무 욕을 많이 한다. 애들을 데려 올 수 없다.”
아직까지 축구장을 자식들과의 동반외출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이래저래 악재였던 셈이다.
후반 막판, 대구 문전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이어 흘러나온 볼을 안승인 선수가 극적으로 차넣어 동점.
안승인 선수는 코너플래그 쪽으로 뛰어가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었다. 할렐루야 선수단의 골 세러모니를 생각하면 되겠다. 이 골이 안승인이 부천에서 넣은 마지막 골이다.
안승인 선수는 당시 부천내에선 182㎝의 키에 가장 빠른 100미터 기록을 가진 준족의 선수였다. 지구력도 좋은편이었다. 최현은 곧 잘 “내가 감독이면 승인이형을 공격수로 쓸텐데...잘 뛰고 체격좋고, 투지있고...”라고 말하곤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니포감독 아래 전성기 시절, 공격수였다. 그러나 2003 시즌부터 윙백으로 내려앉았다. 안승인 선수는 그것을 용납하기 힘들어했다.
공격수 출신으로서 수비수로 전향한다는 것은 늙었다는 것, 한물갔다는 것을 뜻했고 곧 후배들에게 떨려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도 그런 것이 있나모르겠지만 경기중에 일부 젊은 공격수들은 선배 수비수를 제끼면 비웃음을 슬쩍 흘리곤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건 선배 선수로서 치욕이었다.
그러나 당시 안승인으로선 체력적으로나 실력으로 후배들에게 밀릴 것이 없었다고 믿고 있었다. 또 실제로 그랬다. 안승인 선수는 2003시즌 1골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공격가담을 통해 골을 터뜨렸으니 한시즌 많아야 2~3골 넣던 그로선 얼마나 기뻤을까. 자신들을 유린하던 신생팀에게 한방 먹여줬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의 부인과 가족, 친지들이 경기를 보러왔는데 거기서 골을 넣었으니 오죽이나 좋았을까.
그런데 골에 대한 환호성대신 서포터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겨우 대구따위에게 끌려다니다가 후반 막판 겨우 동점골 줏어먹고 무릎꿇고 기도하는 감격의 세러모니나 하고 있을 때냐’가 비난의 이유였다.
훗날 안승인 선수는 이 비난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선수단이 서포터들에게 되려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덕분에 나는 선수들의 푸념을 듣거나 서포터에게 하고 싶은 서운한 감정을 듣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더러 욕도 먹었다. 그러나 3자 대면을 할 수 있으면 모를까, 한 경기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선수와 서포터간의 감정의 골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이후 부천은 안양과 1:2, 전북과 1:2, 포항과 1:1, 전남과 2:2, 또다시 원정을 간 전남과 1:1을 기록해 무승기록을 12경기로 늘렸다. 슬슬 불안한 기운과 패배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2패뒤 3무였지만 1승이 정말 급했다. 이 즈음부터 트르판감독의 경질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기억이 맞다면 서포터들의 트 감독 비난이 완전 극에 달했다.
5월4일 안양경기였는지 6월14일 안양경기였는지 기억이 명확치 않지만 서포터들이 구단버스를 향해 계란을 던졌다. 트르판감독에 대한 불만과 승리하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한 비난이 이유였지만 난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 계란을 던지는 곳이 원정이 아닌 홈이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5월21일 전남과의 2:2 무승부 경기는 사실 첫승을 신고했어야할 경기였다. 다보는 어느때보다 컨디션이 좋았고 몇년간 자신을 이겨보지 못한 전남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사기가 높았다. 더구나 하재훈 코치는 안양 원정경기부터 사실상 감독역할을 맡으며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선수들의 스쿼드나 훈련내용, 작전지시를 모두 도맡았으니까.
나는 안양원정경기에서 트르판 감독은 라커룸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고 하재훈 코치가 작전지시를 하던 장면이 잊혀지질 않는다. 이런모습을 또 어디서 볼 수 있단 말인가. 프로팀에서.
전남과의 홈경기는 초반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선제골에 추가골은 모두 다보의 몫이었다. 기막힌 스루패스에 이은 선제골, 두번째골도 멋진 패스에 의한 골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수비가 무너지며 먹지 않아도 될 골들을 헌납하고 말았다. 다행이도 전남에 대한 무패기록만큼은 이어갔지만 무승의 터널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안양과 다시 만나 2:4로 패한 이후 5경기 연속 무득점 행진이 이어진다.
골은 넣었지만 승리할 수 없던 때였다. 그리고 그렇게 전기리그가 끝났다.
트르판 감독과 오르한 2군코치는 5월인가에 경질됐다. 그가 한국에서, 부천에서 남긴 기록은 3승7무13패.
그는 선수단과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스타파도 퇴출됐다.
하재훈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이제 뭔가 좀 되보려나 싶었다.
그러나 하재훈 수석코치에 대해서도 선수들의 감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최윤겸 감독 경질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다........
3편에서 계속
- 부천 서포터 김요한 님의 글. -
장비 관리사로 활동하셨던 김요한님은
현재 소모임 아이레즈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최고 서포터 헤르메스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계속해서 연재 됩니다. ^^
=============================================================
2003년 3월30일 울산문수구장.
부천은 이미 2골이나 먹은 상태였다. 몇 안되는 부천 원정서포터들의 침묵속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경기는 풀리지 않았고 분명 선수들은 헉헉대고 열심히 뛰었지만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트르판은 자리에서 한번 일어나지 않은채 침묵속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일어나봤자 할 얘기가 없었을 것이다. "빨리빨리", "천천히" 등 기본적인 한국어 조차 못했으니까.
경기전날 부천팀은 울산 모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매니져가 조용한 식사 장소를 따로 내줬고 기념공을 들고와 선수들의 사인을 부탁했다. 보통 윤정춘과 이원식 등은 독방을 썼고 나머지는 2인1실을 썼다. 그 업무는 김갑배 주무님이 맡아했는데 어떤 규칙이 있는 듯 했다.
트르판은 한국에 있을 동안 내내 한국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선수들과 따로 테이블에 앉아 다른 메뉴로 식사를 했다. 다만 패트릭이나 제임스, 다보 등은 한국음식을 그런대로 먹었고 특히나 불고기는 무척 좋아했다. 호텔에서는 대부분 뷔페를 먹기 때문에 대강 골라서 먹을 수 있었는데 선수들은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았다. 과일을 많이 먹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이 얘기만 나오면 불끈하는 두식이가 생각난다. 담배얘기다.
내가 선수단과 일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상당히 많은 선수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점이었다. 담배를 피우면 폐활량에 분명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기본상식이지만 하루 1갑 이상을 피우는 골초도 있었다는 것은 참 특이한 일이다. 프로선수로서 자기관리가 엉망이 아니냐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사랑해마지않았던 이원식 선수 조차 애연가였다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까.
담배를 피우지 않던 김기형 선수는 이런 얘기를 한다.
“담배 니코틴이 쌓일 새가 없던 것 아닌가? 매일 뛰잖아. 담배 피우는 선수들이 헉헉대고 못 뛰는 걸 본적은 없어.”
어쨌든 팀 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선수는 남기일, 김기형, 외국인 선수들, 이동근, 김동규, 진경선, 최현, 한동진과 몇 명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수들은 호텔에 가면 어느 특정 선수방에 모여 함께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선수들에게 담배를 빌려주거나 꾸었던 기억도 난다.
난 특별히 제재할 생각은 없었다. 선수들은 선수 자신의 몸에 대해 누구보다 잘안다.
신승호 선수가 주전으로 도약하기 위해 담배를 끊고 그야말로 열심히 훈련해 결국 주전으로 도약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컨트롤에 대해선 군소리가 필요없는 거였다. 안승인, 이원식 등 애연가들은 여전히 팀 내에서 100미터 최상위권 기록을 가지고 있고 쿠퍼테스트 같은 것도 상위권으로 통과하는 양반들이었으니까 담배와 운동선수와의 상관관계는 지금도 모호하다.
0:2로 지던 울산과의 경기가 후반 중반을 넘어설때였다.
다보가 넘어지며 패널티킥을 유도한다. 1골을 따라붙을 수 있는 상황. 키커는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경기전 작전대로 키커위치에 섰다.
제임스는 정말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늘 유지되는 엄청난 근육과 보디라인. 강철같은 허벅지,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슈팅의 강도도 막강했다. 그리고 매너도 매우 좋았다.
터키 트라브존스포르에선 엄청난 포스를 내뿜었다고 한다. 몸싸움에선 지지 않았고 유연했으며 또한 강력했다. 그래서 구단관계자들도 싼값에 보물을 건졌다고 좋아했다.
그런 제임스가 패널티킥 실축을 했다. 울산 서동명이 제임스의 슛을 막아버린 것이다. 인사이드로 키퍼의 왼쪽으로 공을 밀었지만 서동명이 예측을 해버렸다. 제임스의 낙담하는 표정이란.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순간 트르판의 표정이었다. 보통 패널티킥 실축이 나오면 감독은 노발대발해야하고 혹은 아쉬운 듯 물병을 내려치거나 던지거나 뭐 그래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트르판은 엷은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 안통하니 물어볼 수도 없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윙크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감독에 대한, 팀에 대한 열의가 이미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역전의 발판은 예상외의 선수에게서 나왔다. 후반에 실수로 한골을 먹게만든 장본인. 수비수 김동규가 울산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보기에도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린다. 그리고 다보의 멋진 다이빙 헤딩슛. 스코어 1:2. 선수들은 다보로 몰려갔다. 시즌 개막이후 3경기만에 첫 골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경기 이후 선수단은 호텔로 돌아가 식사를 했다. 3연패를 당한 선수들의 입맛이 좋을리 없고, 분위기가 좋을리 없었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최현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버스 앞에서 김동규를 나무란 것이다. 첫실점의 이유가 김동규 탓만은 아니었지만 상대선수를 놓친 김동규의 플레이가 결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뭐, 선후배 관계 철저한 한국 축구판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나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수비라인 전체를 관장하는 골키퍼 입장에서 눈에 빤히 보인 신인 김동규의 실수를 지적해주고 싶었던 맘도 이해한다.
그런데 김동규가 울기 시작했다. 안승인, 이원식, 윤정춘이 다가오며 말렸다. 최현은 왜 우냐고 소리치고.
지긴 했지만 프로데뷔 3경기만에 첫 공격포인트를 올린 김동규는 진 경기의 탓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김동규의 분한 마음은 따로 있었다.
김동규는 경희대 시절, 촉망받던 선수였다. 예전 대표팀의 유상철 같은 존재랄까. 최종 공격수부터 최후방 수비까지 골키퍼 빼고는 다하는 선수였다. 김동규가 3학년 시절, 전국 춘계리그에서 그는 후반에만 출격하는 이원식 처럼 스윽 나타나 동점, 결승골을 작렬시키는 등 해결사 역할을 하며 우승을 했다.(아니면 준우승...기억이...)
당시 경희대는 나름 최강이었다. 현재 인천에 있는 이준영, 부천에서 활약한 이동근, 최형준, 김동규 모두 경희대였다. 그중 김동규는 이동근과 함께 모두가 인정하는 플레이어였다.
김동규 자신은 수비수보다 공격형 미들이나 공격수가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천에 와서 맡은 것은 윙백이었다. 끊임없이 사이드로 파고드는 발빠른 상대 공격수를 마크해야 하고 중앙공격수와 호흡을 맞춰 상대선수들과 경합을 벌여야 하는 자리다.
“감독이 맡기는 자리에서 충실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이건 뭐 선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니....나를 윙백에 갖다 놓으면 안될 건데....”
김동규의 푸념이 아직도 귓가 들리는 듯 하다.
어쨌든 울었다는 이유로 경상도 사나이 최현은 한동안 김동규를 갈궈댔고 이런 작은 삐걱거림들이 모여 선수단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줬다면 그 부진과 절망의 22연속 무승이 조금은 이해가 될까.
울산과의 원정경기에서 지고 난 이후, 라커룸에서 제임스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제임스가 좀 까만가. 덩치는 작은가. 그런 그가 패널티킥 실축이 곧 패배로 이어졌다는 죄책감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몰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주섬주섬 선수들이 벗어놓은 유니폼을 챙기다가 우연히 그 눈물을 봤고.
최선을 다한 사내의 눈물은 진하다.
이후 수원에게 0:1로 패한 이후 트르판도 생각이 있었는지 김동규의 자리를 한칸 더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부천은 극심한 골 가뭄에 허덕이고 있었고 슬슬 언론에선 4연패의 부천을 걱정(?)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선수들이 흘리는 땀을 직접 보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이것을 이겨낼 것이라 믿었다. 골이 터지기 시작하면 좋아질 것이라 믿으면서.
2003년 4월12일, 성남과의 홈경기.
어머니 생신도 챙기지 못하고 경기장으로 (일하러)갔다. 기억이 맞다면 서포팅이 이즈음 다시 시작됐다. 부천서포터의 목소리는 정말 우렁찼고 경기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나도 덩달아 신났다. 일이 힘든지도 모르게.
장비관리사는 평소 선수단의 유니폼과 운동복 관리가 1순위 업무다. 그밖에 훈련용 도구와 공, 가방을 챙기는 것과 새로운 선수가 오면 배번에 따른 유니폼 지급, 운동복 지급도 내몫이었다.
경기장에선 주로 트레이너들을 도왔다. 물병도 건네고 수건도 준다. 아무렇게나 벗어놓는 운동복도 가방에 넣는다. 추울때는 교체되서 나오는 선수들에게 돗바를 건네기도 한다.
그런데 난 부천경기장에서 한번도 선수단 좌석에 앉아본 일이 없다. 자리가 모자라서였다. 다른 경기장은 대부분 함께 앉아 있는데 부천만 유독 그랬다. 그건 좀 아쉽다.
어쨌든 서포팅 덕분인지 무려 2골을 넣었다. 시즌 첫 멀티골. 그러나 실점이 4개나 됐다. 이제와 얘기지만 김도훈이란 공격수는 적어도 K리그 안에선 참 좋은 스트라이커 였다. 수준급의 체격과 골에 대한 집중력, 그리고 파괴력까지. 물론 주워먹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주워먹는것조차 되지 않았던 부천 입장에선 김도훈의 존재는 무거웠다.
이 경기에서는 비밀이 한가지 있다. 바로 최거룩 선수의 첫골인데, 핸들링 반칙이었다. 문전에서 높이 뜬 볼을 왼팔로 주르륵 흘러내리게 컨트롤 한 것인데 마침 골대뒤에 있던 나는 그 장면을 정확히 봤다. 문제는 심판도 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슬프게도 어차피 경기에 질 부천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어진 4월27일 광주와의 경기 1:2 패배는 지금와선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날 하재훈 수석코치가 선수단을 따로 불러 맹비난했던 기억은 남는다. 트르판이 하지 못하는 선수들 정신력 강화에 드디어 나선 것이다.
또한 군발이 팀에게도 졌다는 서포터들의 맹비난도 있었다.
4월30일 대구와의 홈경기는 우리가 첫 승점 1점을 기록한 날이다.
1점을 먼저 실점한 부천은 또다시 패배의 기운이 드리워있었다. 대구선수들은 신생팀 답지 않게 무명의 투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당시 선수단 사이에서는 대구 박종환 감독이 프로선수고 뭐고 그냥 ‘빠따’를 내리갈긴다는 소문이 있었다. 스파르타식 훈련에 고등학생도 안한다는 숙소에서의 외출허락, 외박허락 등은 선수를 완전히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리팀은 골결정력 부족, 수비불안, 패스미스, 투지실종, 조직력 와해 등 축구팀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서포터들의 욕설이 본격화된 것도 이 즈음이다.
여기서 한가지 되짚어볼 문제가 있다.
바로 서포터들의 욕설인데, 좋은 선수들 키워 팔기만 하고 투자는 하지 않는 구단의 처사와 투지가 실종된 선수단의 모습은 충분히 욕설을 퍼부을만 하지만... 관중수가 급감한 것이 단지 구단의 잘못된 행태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성철 선수 와이프와 안승인 선수 와이프의 친구 가족이 애들을 데리고 경기장을 찾았다가 질겁을 했다.
“서포터들이 너무 욕을 많이 한다. 애들을 데려 올 수 없다.”
아직까지 축구장을 자식들과의 동반외출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이래저래 악재였던 셈이다.
후반 막판, 대구 문전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이어 흘러나온 볼을 안승인 선수가 극적으로 차넣어 동점.
안승인 선수는 코너플래그 쪽으로 뛰어가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었다. 할렐루야 선수단의 골 세러모니를 생각하면 되겠다. 이 골이 안승인이 부천에서 넣은 마지막 골이다.
안승인 선수는 당시 부천내에선 182㎝의 키에 가장 빠른 100미터 기록을 가진 준족의 선수였다. 지구력도 좋은편이었다. 최현은 곧 잘 “내가 감독이면 승인이형을 공격수로 쓸텐데...잘 뛰고 체격좋고, 투지있고...”라고 말하곤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니포감독 아래 전성기 시절, 공격수였다. 그러나 2003 시즌부터 윙백으로 내려앉았다. 안승인 선수는 그것을 용납하기 힘들어했다.
공격수 출신으로서 수비수로 전향한다는 것은 늙었다는 것, 한물갔다는 것을 뜻했고 곧 후배들에게 떨려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도 그런 것이 있나모르겠지만 경기중에 일부 젊은 공격수들은 선배 수비수를 제끼면 비웃음을 슬쩍 흘리곤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건 선배 선수로서 치욕이었다.
그러나 당시 안승인으로선 체력적으로나 실력으로 후배들에게 밀릴 것이 없었다고 믿고 있었다. 또 실제로 그랬다. 안승인 선수는 2003시즌 1골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공격가담을 통해 골을 터뜨렸으니 한시즌 많아야 2~3골 넣던 그로선 얼마나 기뻤을까. 자신들을 유린하던 신생팀에게 한방 먹여줬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의 부인과 가족, 친지들이 경기를 보러왔는데 거기서 골을 넣었으니 오죽이나 좋았을까.
그런데 골에 대한 환호성대신 서포터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겨우 대구따위에게 끌려다니다가 후반 막판 겨우 동점골 줏어먹고 무릎꿇고 기도하는 감격의 세러모니나 하고 있을 때냐’가 비난의 이유였다.
훗날 안승인 선수는 이 비난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선수단이 서포터들에게 되려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덕분에 나는 선수들의 푸념을 듣거나 서포터에게 하고 싶은 서운한 감정을 듣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더러 욕도 먹었다. 그러나 3자 대면을 할 수 있으면 모를까, 한 경기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선수와 서포터간의 감정의 골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이후 부천은 안양과 1:2, 전북과 1:2, 포항과 1:1, 전남과 2:2, 또다시 원정을 간 전남과 1:1을 기록해 무승기록을 12경기로 늘렸다. 슬슬 불안한 기운과 패배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2패뒤 3무였지만 1승이 정말 급했다. 이 즈음부터 트르판감독의 경질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기억이 맞다면 서포터들의 트 감독 비난이 완전 극에 달했다.
5월4일 안양경기였는지 6월14일 안양경기였는지 기억이 명확치 않지만 서포터들이 구단버스를 향해 계란을 던졌다. 트르판감독에 대한 불만과 승리하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한 비난이 이유였지만 난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 계란을 던지는 곳이 원정이 아닌 홈이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5월21일 전남과의 2:2 무승부 경기는 사실 첫승을 신고했어야할 경기였다. 다보는 어느때보다 컨디션이 좋았고 몇년간 자신을 이겨보지 못한 전남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사기가 높았다. 더구나 하재훈 코치는 안양 원정경기부터 사실상 감독역할을 맡으며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선수들의 스쿼드나 훈련내용, 작전지시를 모두 도맡았으니까.
나는 안양원정경기에서 트르판 감독은 라커룸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고 하재훈 코치가 작전지시를 하던 장면이 잊혀지질 않는다. 이런모습을 또 어디서 볼 수 있단 말인가. 프로팀에서.
전남과의 홈경기는 초반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선제골에 추가골은 모두 다보의 몫이었다. 기막힌 스루패스에 이은 선제골, 두번째골도 멋진 패스에 의한 골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수비가 무너지며 먹지 않아도 될 골들을 헌납하고 말았다. 다행이도 전남에 대한 무패기록만큼은 이어갔지만 무승의 터널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안양과 다시 만나 2:4로 패한 이후 5경기 연속 무득점 행진이 이어진다.
골은 넣었지만 승리할 수 없던 때였다. 그리고 그렇게 전기리그가 끝났다.
트르판 감독과 오르한 2군코치는 5월인가에 경질됐다. 그가 한국에서, 부천에서 남긴 기록은 3승7무13패.
그는 선수단과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스타파도 퇴출됐다.
하재훈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이제 뭔가 좀 되보려나 싶었다.
그러나 하재훈 수석코치에 대해서도 선수들의 감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최윤겸 감독 경질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다........
3편에서 계속
- 부천 서포터 김요한 님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