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동호회 게시판이 고전게임동호회에서 열리기 전에 전 국민은행으로 달려가서 대표팀 경기 입장권을 샀습니다.
당시 월드컵 지역예선 1라운드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였죠.
당시는 홈&어웨이가 아니라 한군데에서 모여서 예선전을 치루던 때입니다.
"은행에서 표를 팔아요?"
라고 하실수 있겠지만 그땐 온라인 예매라는게 없었어요. 다 현장에서 사던가 특정 예매처에 가서 표를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국민은행도 월드컵 예선전의 스폰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은행은 웬만하면 전국 곳곳에 있다보니 접근성이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해서 이런 방법을 썼을 겁니다.
어쨌건 그렇게 예선전 전부 표를 샀습니다.
전 경기를 볼수 있게 되었어요. 아니다 결국은 한경기 빼고 다 보게 되었네요.
기본적으로 홈&어웨이가 FIFA의 원칙이지만 아시아지역이 워낙 넓은데다가 가난한 나라들이 많다보니 1986년 월드컵 예선을 제외하고는 1998년 최종 라운드 이전까지는 올림픽이건 월드컵이건 지역예선은 한군데에 모여서 경기하는게 거의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되려 '홈&어웨이'로 치뤄지는게 특이한 케이스였죠.
마침 같은 학교의 선배인 안범용 선수가 골키퍼로 선발되었습니다. 응원하러 갈 겸사겸사로 당시 입장권을 다 사버렸습니다. 강의는 째버리고...그 덕분에 나중에 교수님들에게 꽤 혼났죠.
경기는 선수들과 같이 봤습니다. 아시겠지만 엔트리 22명을 뽑았어도 벤치 멤버 외에는 경기장 관람석에서 봐야 했거든요. 그래서 안범용 선수도 경기장 관람석에 있었고 안범용 선수 외에도 최영준(네 전 부산 감독님 맞습니다) 선수 같은 분들과 같이 경기를 봤습니다.
그리고 전 이런 이야기들을 게시판에 글을 써서 올렸죠.
그런데 어느 순간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마지막 경기 바레인 전은 일요일에 하는데 경기 같이 보죠?"
어?
그거 괜찮은데?
야 그거 좋다.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 그동안 갔었던 경험으로 경기장 지형을 파악해 놨습니다. 당시는 경기장 관람석 좌석번호를 다 볼수 있는 정보도 없었고...그런 지정석도 아니던 때였어요!
모이기로 했습니다. 표는 한꺼번에 구입하지 못했지만 한날 한시에 모여서 경기를 보자고.
모이기 위해 어디서 봐야 할지 미리 정해야 했습니다. 당시엔 핸드폰을 들고 다닌다는건 진짜 있는 집 사람이었던 때이고 핸드폰이 '벽돌'소리를 듣던 바로 그 시기였죠. 어디쯤 보기로 하고 그냥 그날 물어보며 다니자, 못보면 어쩔수 없지. 그냥 A4종이에 '하이텔 축구동'이라고 사인펜으로 쓰고 그거 들고 있던가 하자.
...ㅎㅎ 주먹구구식이지만 그땐 그랬던 때입니다.
1993년 6월 13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1차예선 2라운드.
바레인전.
이날이 역사적인 하이텔 축구동의 첫 단체관람날입니다.
이날도 10여명이 모였습니다. 얼마 안되는 인원이지만 그래도 첫 모임이었다는 것.
우리를 알리는 어떤 상징물도 없는 상황에서 어렵게 모였습니다.
경기는 3:0 으로 이겼습니다.
이때 부시삽중 한분인 jjeowl 정지은 누님. 그분이 구상범선수를 엄청 좋아하셨죠. 그때 대표팀의 주장이 구상범 선수였어요. 정지은 누님 생각해서 저는 예선전 기간 중에 하루를 잡아 동대문에서 공 사들고 타워호텔에 가서 안범용 선수에게 '구상범 선수 사인좀 받아다줘요' 하고 부탁했었습니다. 안범용 선배는 그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구상범 선수의 사인공을 정지은 누님은 그날 받으셨습니다. 그날 구상범 선수는 골까지 넣으셨어요. 아주 멋진 발리슛이었죠. 진짜 그날 정지은 누님의 얼굴은 모든걸 다 가진 행복한 얼굴이셨습니다. 너무 즐겁고 좋았다고. 나중에 말씀을 더 해주셨는데 이사갈때도 그 공은 잘 포장해서 보물로 싸들고 갔다고 하시더군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합니다.
정지은 누님 외에도 같이 만났던 하이텔 축구동호회 회원 여러분들은 좋았다. 즐거웠다는 글들을 올려주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10여명의 작은 모임에 합류하지 못했지만 경기장에 오셔서 경기를 봤다는 분도 여럿이었습니다. 모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같은 의식과 행동을 해 주신 분도 있던 거지요.
이렇게 처음으로 같은 경기를 보러 '하이텔 축구동호회'회원들이 날잡고 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고 오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후 게시판의 글 중에는 가끔가다 '언제 어느 경기보러 갈건데 같이 보실 분?' 하는 글이 가끔가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발 나간 거였습니다.
그리고 james008 양현덕 님이 영업을 열심히 뛰셨습니다.
다른 동호회는 후원업체가 있는데 우리도 후원업체가 있어야 뭔가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틀린말은 아니죠. 각자 용돈만을 가지고 뭔가 한다는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james008 양현덕님은 그 행동력으로 기획을 짜서 후원업체에게 기획안을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원석님의 이번 게시물은 하이텔 첫 단관(단체관람)의 역사를 흔히 이야기하는 95년이 아니라 93년으로 당기는, 아주 의미가 있는 글입니다. 93년 6월 5일에도 단관을 시도했지만 운영자 5인 이하가 모여서 단관이라기 보다는 간부모임(?)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이 단관은 유니폼(또는 같은 색 옷), 뿔피리, 현수막 등 서포터 형태의 응원을 시도한 95년 단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하이텔 모임이 향후 꾸준하게 이뤄지면서 하이텔을 하지 않는 컴맹 형님들이 한 분씩 슬슬 다가와서 같이 하기 시작합니다.